성장하는 한국 영화 속의 그늘…저임금·계약제도 개선 과제

우리 영화가 잘나가고 있다고 난리다.
그러나 왜 모든 곳에는 '빛과 어둠'이 존재해야만 하는 것일까.

빛나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영화인이 있는 반면 스포트라이트 밖에서 영화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일하다 '노동의 무게'에 눌려 영화계를 떠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있다.

■ 스탭의 노동조건 '처참'…부상·사망사고도 발생
오는 26일은 대종상 시상식. 대종상 후보작을 만들고도 영화계를 떠나기 위해 짐을 챙기고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 영화계에선 이들을 '스탭'이라고 부른다.

촬영, 조명, 기술, 녹음, 분장 등 스크린 밖에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영화산업의 전 분야에 걸쳐 직접 혹은 간접적인 업무에 종사하는 개인으로 구성된 '영화인회의'(99년 영화인협회에서 독립, 스크린쿼터 사수투쟁 등에서 개혁적 행보를 보여왔다)의 '제작환경개선위원회'에서 스탭들의 근로조건 실태를 조사한 바 있는 유형진 간사(조우필름)는 "스탭들의 근로조건은 '비정규직' 수준도 안 된다"고 입을 열었다.

스탭들의 노동조건에서 가장 큰 문제는 몇십년 동안 이어온 저임금과 도제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영화 한 편 당 300만원 가량 받는다. 영화 제작기간이 1년이 될 경우 한달 25만원꼴인 것이다. 최저임금을 논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다.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후 배우들이 런닝개런티를 받으며 몇억씩 챙기는 것과 비교해 볼 때 하늘과 땅 차이다.

제작기간이 더 늘어난다 해도 추가임금은 없다. 제작시간이 곧 돈이기 때문에 전쟁터 같은 제작현장은 쉴 틈도 없다. "내일 몇 시까지 어디로 집결!" 하면 새벽이건, 한밤중이건 가야 하고 며칠이 될지 모른다. 그곳에서 며칠동안 촬영이 이어지면 계속 '노동'해야 한다.

부상도 비일비재하다. 몇 해 전 꽤 이름이 알려졌던 한 영화의 조명스탭은 쓰러지는 조명기구에 머리를 맞아 사망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죽음조차 '몇백만명 돌파'라는 눈부신 한국영화의 성장 속에 가려져 있었다.

■ 제2의 임권택 꿈 속 노동조건 개선 뒤로 밀려
어찌보면 한국영화의 성장은 스탭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과언이 아니다.

일부 영화인들은 "스탭들의 헌신으로 우리 영화가 이만큼 발전했는데, 스탭들의 처우개선을 하게되면 그나마 어려운 영화제작 환경은 더욱 어려워진다"고 우려하기도 한다. 실제 스탭들이 실력을 보여주면 노동조건을 개선하겠다, 노동조건이 개선되면 더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등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식의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몇십년 동안 영화계의 열악한 노동조건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수요인력보다 많은 공급인력이다. 한 편당 50여명의 스탭이 일한다고 할 때 한해 평균 50편의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으니, 2,500여명의 스탭이 필요하다. 잘 나가는 스탭은 한해동안 몇 편의 영화에 참여하니 실제 필요인력은 훨씬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계 주변에는 "공짜로라도 일을 시켜달라"고 졸라대는 '제2의 임권택'을 꿈꾸는 이들이 너무 많다. 소속이 없는 스탭들은 영화가 제작되기 직전 팀을 꾸려 제작사와 계약하기 때문에 현재 영화계의 스탭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기도 힘들다.

영화 관계자들은 "돈 받고 일하겠다는 생각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스스로를 깎아 내리는 이 같은 행위는 모두를 죽일 수도 있기 때문이란다. 영화인회의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스탭 중 70% 이상이 대졸자라고 하니 이들의 '영화에 대한 꿈'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겠다.

제작팀에서 일하는 몇 명과 대화하던 중 "어찌나 돌아다녔는지 발이 부어서 절뚝거리면서 일했을 때가 있다"는 얘기를 하던 도중 한 여성이 "저는 영화 때문에 외국유학까지 갔다왔는데 하는 일은 보조일 뿐이죠…"라는 말에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그런데 보통 4∼5명으로 구성된 촬영팀이나 조명팀 등에서 감독 지휘 아래 카메라나 조명기구를 만질 수 있는 사람은 소위 '퍼스트(first)'급이고, 나머지 스탭의 임무는 대부분 장비운반이다. 막내급 보조에서 퍼스트급까지 올라가는데 생계문제를 해결하면서 버틴다해도 10년의 세월이 걸린다. 이러다 보니 "한 작품 하고 (영화계를) 떠나는 게 현실"이다.

■ 스탭노동자들이 나섰다…'스탭운동' 확산
작년 대종상 시상식 때 10여 명의 스탭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피켓팅을 벌인 것은 일대사건이었다. 그때 시위자들을 중심으로 지난해 3월14일 다음 카페에
'비둘기 둥지'(http://cafe.daum.net/vidulgi)라는 보금자리도 만들었다. 회원 3,000여명 중 영화 스탭만 70%에 이른다.

이 '스탭운동'은 처음엔 임금인상이 가장 큰 목표였지만, 점점 고용기회 확대와 제도개선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스탭들 처우개선에 있어 가장 시급한 문제는 '저임금 개선'과 '계약관행 개선(표준계약서 실행)'이다.

또한 '영화인회의' 관계자는 "교육을 통한 전문화가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현재 도제시스템은 현장 분위기를 익히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대학의 영화관련 학과를 졸업하지 않고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찾기 힘들어 한국영화 발전의 토대가 될 전문인력 양성이 어렵다는 것이다.

영화계는 그간 제작사가 촬영감독과 계약하면서 '촬영팀은 얼마'하는 식으로 일괄계약을 해온 관행이 있어 현장스탭은 개별계약을 하질 않았다. '표준계약제'란 스탭들이 개별계약을 하는데 있어 기준이 될 수 있는 계약서를 만들어보고 실행해 보자는 것이다. 여기엔 근로시간, 임금, 사회보험(의료보험만이라도) 가입 등이 포함된다.

'스탭운동'을 벌이고 있는 이들은 '영화인회의'에서 스탭들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과 별개로 스스로 조감독협의회나 촬영조수협의와와 같은 업종별 협의체 구성을 시작으로 '권리 찾기'에 나서고 있다. '비둘기 둥지' 운영자인 고병철씨는 "이렇게 열악한 상황에서도 대응이 없었냐"는 물음에 "몇 년간 이어온 관례 속에서 스탭들을 조직하는데 시간이 걸렸을 뿐"이라며 "업종별로 입장정리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답했다.

■ '비둘기 둥지'를 틀고…노조결성을 위해
고병철씨는 "내년 상반기 노조결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제 '노조결성'으로 목표가 잡혔다는 뜻이다. 영화계 스탭들의 노조결성에 있어 과제는 남아있다. 스스로 '예술인'은 '노동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다. 지금처럼 대체인력이 넘쳐나는 상황에선 이들의 단결권이 교섭권이나 행동권까지 담보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제작자나 감독을 설득해야 하는 문제도 있다.

그러나 우리 영화계가 꿈꿔왔던 '허리우드'에도 '노조'는 있다. 허리우드에선 장비업체와 계약하는 방식으로 우리나라 도제시스템 속에서 조수급들이 하는 장비이동과 설치 등의 업무를 담당하게 하고 있다고 한다. 노조 조합원들의 전문성이 비조합원들보다 훨씬 뛰어나기 때문에 '힘'도 갖고 있다.

빛이 강해질수록 명암은 더욱 극명해진다고 했던가. 우리 영화가 더욱 발전할수록 영화계에 대한 관심은 더욱 증폭될 것이다. '주5일제 확대'로 영화산업도 더 발전할 것이란 관측도 있다. 스탭들은 빛에 가려진 어둠 속에 머물 것인가. 스탭들이 한 걸음씩 내딛고 있는 '권리 찾기 운동'이 결실을 맺을 때 영화계의 무대를 더욱 넓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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