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라도 맘놓고 살고 싶다"…"자진신고는 쫓아내기 위한 속임수"




◁ 문래동 구 남구지원 불법체류 자진신고장에서 외국인 노동자들과 중군동포들이 줄지어
접수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외국인 집' 자원봉사자들이 신고서를 대필해주고 있다.

▷ '자진신고거부, 노동비자발급, 이주노동자 탄압분쇄'를 주장하며
명동성당에서 농성중인 네팔 풀신 버지라씨(좌)와 비두씨(우)이들은
"지금 자진신고를 하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정부의 미봉책에 끌려가는 짧은 생각" 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10일 문래동 (구)서울지법 남부지원. 3월부터 시작된 불법체류자 자진신고를 위한 수도권지역 접수처 4곳 중의 한 곳이다. 이날 저녁 어스름 청사 마당을 찾으니 '외국인 노동자의 집'과 '중국동포의 집' 등 외국인노동자 관련 단체들의 천막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서 이 단체에서 나온 자원봉사자들이 무엇인가 열심히 적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 줄서서 자진신고하는 외국인 노동자
자원봉사자들이 작성하고 있는 것은 불법체류 자진신고서.
영어를 잘 모르는 중국동포들을 대신해 신고서 작성 봉사를 시작한 이들은 다른 외국인들의 신고서도 대필해 주고 있었다. 이들이 봉사를 나오기 전에는 여행사에서 신고서를 대필해 주고 5만원씩 받았다고 한다. 이들 자원봉사자들이 늘어나면서 여행사는 2,000원으로 비용을 깎았다고 한다.

필리핀에서 온지 10년째 되는 더글라스와 마리빌 레이에스 부부는 성폭행 관련한 법원의 판결문을 항상 가방 속에 넣어 다닌다. 마리빌씨는 지난해 일하던 회사 사장으로부터 성폭행 당해 임신중절수술까지 받아야 하면서 사장을 고발했다. 단속에 걸리더라도 아직 법원에 계류중인 재판 문건이 있으면 강제추방을 피할 수 있기 때문에 판결문을 가지고 다닌다는 설명이다. 재판이 빨리 끝날 것을 대비해 자진신고를 하러 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이날 공장 일을 다 마치고 오는 바람에 미처 신고 접수를 하지 못하고 다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건물 관리를 하고있는 한 직원은 "오늘은 평소보다 신고자들이 적어 일찍 끝났다"며 "밤 9시부터 한두명이 입구 앞에서 기다리기 시작해 다음날 새벽 5시가 되면 입구에서부터 근처 골목까지 외국인들이 줄을 서서 접수를 기다린다"고 말했다.

다음날 다시 찾으니, 구남부지원 마당에는 접수를 기다리는 수백명의 외국인들과 중국동포들이 경찰의 통제를 받으며 줄지어 앉아 있다. 한국에 온지 3년째 됐다는 한 방글라데시 출신노동자는 "아침 8시부터 줄서서 기다리느라 화장실도 못 가고 식사도 못했지만 1년 체류허가를 받을 수 있다니 좋다"며 '굿'을 연발한다.

또 중국 흑룡강에서 왔다는 김아무개씨(여)는 "항상 단속을 우려해 마음 졸이고 살았는데 1년이라도 체류허가를 얻어 기쁘다"며 "하지만 입국할 때 썼던 돈도 못 번 상태에서 1년이 지났다고 절대 귀국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다른 한 중국동포 역시 "딸이 결혼해 한국에 살고 있다"며 "1년 뒤에도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자진신고를 받는다고 해서 불법체류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 없음을 암시하기도 했다.

법무부에 따르면 5월13일 현재 자진신고를 한 불법체류 외국인은 15만여명에 달하고 있다.

■ 자진신고 거부하며 농성하는 외국인 노동자
반면 이같은 불법체류 자진신고에 대해 명동성당에서는 또 다른 외국인노동자 및 관련단체들이 상반된 주장을 펴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서울경인지역 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 소속 외국인 조합원들을 비롯해 이윤주 지부장은 지난달부터 명동성당 발전노조 천막 옆에서 이주노동자 탄압분쇄, 노동비자발급, 불법체류자진신고 거부를 주장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주노동자지부는 지난 3월 정부의 '불법체류종합방지대책' 발표에 강하게 반발하며 지난달 7일 1,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집회를 가진데 이어 두 번째 집회가 계획했으나 경찰의 집회 참가자에 대한 단속·추방 방침에 따라 무산되자 농성에 들어간 것이다. 농성 중인 방글라데시 출신 비두씨와 꼬빌씨는 두 번째 집회가 무산된 이후 강제추방하겠다는 공장 관리자와 경찰의 협박을 피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농성에 참가했다고 한다.

발전노조 농성장에서 배드민턴 채를 빌려 운동하고 있던 비두씨는 "인권이라고는 없는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이 모두 함께 자진신고를 거부해야 한다"며 "그래야 이주노동자들의 피해를 고칠 수 있고 자진 신고하면 우리의 힘은 더욱 없어진다"고 말했다.

"노동비자를 줘서 합법적으로 원하는 만큼 일하게 해 줘야지요.
한국정부의 발표는 이제까지 3D업종에서 고생한 사람들을 내쫓고 새로운 사람들을 들여오려는 이상도 아닌 것입니다."

나중에 농성에 합류한 네팔출신 버지라씨는 "1년 동안 체류허가를 받았다가 도망간다는 것은 짧은 생각"이라며 "도망가면서부터 쫓고 쫓기는 생활과 강제추방은 다시 시작돼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다.

또 버지라씨는 "자진신고가 실시되고 있는 지금도 외국인노동자들은 단속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 10일 6명의 이주노동자들이 경찰의 단속에 걸려 출입국관리소 넘어 가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들은 자진신고를 해 놓고 1년 뒤 귀국하지 않기 위해 항공권을 반환했다가 항공권이 없다는 이유로 연행됐다고 한다. 자진신고제가 불신을 받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다.

■ "지금은 투쟁할 때" vs "현실을 직시할 때"
지난 3월 정부가 발표한 '불법체류종합방지대책'에 따르면 불법체류미등록 상태에 있는 외국인들은 3월25일부터 5월25일까지 자진신고를 할 수 있으며 신고한 자들은 1년 동안 합법적인 체류허가를 얻게 된다. 그러나 5월25일 이후는 미신고자들에 대한 집중적인 단속과 강제추방이 진행될 예정이다.

이를 두고 이주노동자지부는 전면철회를 주장하고 있는 반면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는 조건부 찬성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주노동자지부는 "방지대책은 고용허가제를 실시하기전에 현재의 이주노동자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노동자들을 받으려는 정부의 음모"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윤주 지부장은 "자진신고를 해도 여권, 항공권, 신고서를 실수로 하나만 소지하지 않아도 단속대상이라는 점, 원칙상 체류허가일 뿐 공장에서 일하다 적발되면 역시 단속대상이 된다는 점을 일부에서는 간과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지부장은 "지금부터 1년이 지나면 일부의 기대대로 체류기간연장이나 최소한의 인원에 대해서는 사면조치가 있겠지만 일시적인 사면과 합법화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이 지부장은 "지금은 정부가 던져 놓은 정책이 이끌리기보다는 이주노동자들을 조직하고 노동허가, 노동비자 쟁취를 위해 투쟁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외노협은 "방지대책은 미봉책이자 졸속책"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대다수의 이주노동자들이 1년간만이라도 합법적 체류허가를 받기를 바라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주노동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진신고 전인 지금도 미등록 상태이고 합법체류 기간이 만료된 1년 후 도망가도 미등록 상태이므로 더 나빠질 것이 없다는 주장이다.

외노협 석원정 공동대표는 "자진신고를 전면거부하자는 주장은 이주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참혹한 현실을 피상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외노협은 자진신고여부는 이주노동자들 자신이 결정하게 하고 △ 연수제도 철폐 △ 노동허가제 실시 △ 불법체류노동자 사면 △ UN이주민협약 비준 등 근본적인 제도개선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마디로 '선 완전합법화 후 제도개선'과 '선 제도개선 후 완전합법화'라는 주장이 맞서고 있는 셈이다.

직장에도 나가지 못하고 줄서서 자진신고하는 이들, 반면 다니던 직장까지 때려치우고 자진신고를 거부하며 농성하는 외국인노동자들. 얼핏보면 상반된 입장 같아도 이들의 행동에는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현지 임금의 수배에서 수십배의 높은 소개료를 주고 멀리 돈을 벌러 온 타향에서 이제는 멸시와 무시가 아닌 정당한 노동의 대가와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찾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더 이상 미봉책이 아닌 이들의 인권과 노동권을 보장해줄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마련이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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