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쉼터 ‘샬롬의 집’ 운영…한센씨병 환자들과 함께 먹고 마셔

이정호(45) 신부는 교회 앞 공터에서 족구를 하고 있다. 일요일 미사를 마치고 나온 신자들과 편을 나눈 듯했다. 그의 얼굴은 시커멓고 체구는 컸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면서 그는 “이곳은 원래 한센씨병 환자(음성나환자)의 집단 정착촌이었지요”라고 말했다.

“처음 부임했을 때 병의 후유증을 앓던 원주민들은 제가 사제(司祭)라는 이유로 음식을 따로 줬습니다. 그러면 제가 한 그릇에 냅다 음식을 섞은 뒤 게걸스럽게 먹어치웠어요. 술 마시는 자리에서는 같은 잔을 돌렸지요. 간혹 러닝셔츠에 고무신을 끌고 들소처럼 동네를 어슬렁거렸습니다. ”

그는 지난 90년부터 경기도 마석의 가구공단에 있는 성공회 교회의 주임신부를 맡아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신자는 60여명. 하지만 이 지역에 모여 사는 주민들과 외국인 노동자 1500여명에게는 공히 ‘파더(Father)’ 로 통한다.

“주민들이 나를 만나고 싶다면 사무실로 오라고 한 적이 없어요. 한밤중이든 새벽이든 꼭 내가 이들에게로 갔습니다. 이들은 마음의 문을 열어줬습니다. 자신들의 서러운 얘기를 들려줬을 때 내 몸에서는 뜨거운 기운이 났지요. ”

처음에는 주로 원주민만 살았지만, 가구공장이 생겨나면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몰려왔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동네에 또 다른 소외된 이방인들이 합류한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에게서 우리 형님의 모습을 봤습니다. 형님도 미국 LA에서 불법 체류하던 시절이 있었지요. 이들과 다를 게 없었죠. 원주민들에게 이들을 돕고 싶다고 했지요. 설움 받아온 원주민들이 낯선 외국인 노동자를 위해 헌금을 냈을 때 저는 정말 눈물 흘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 옆에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쉼터 ‘샬롬의 집’ 을 지었어요. 이들에게 법적인 체류 자격을 제가 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체류하는 동안이라도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고 싶은 거죠. ”

이날도 ‘샬롬의 집’ 은 외국인 노동자들로 붐비고 있다. 임금체불을 상담하고, 의료공제를 묻는다. 이를 위해 교회가 고용한 직원은 4명이다. 교회 재정의 절반(5600만원)이 여기로 빠져나간다. 그는 왜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는가.

“그런 식으로 복지관을 운영한다면 정부대행기관일 뿐이지요. 교회만의 존재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같은 작은 교회가 이런 일을 하면 큰 교회는 백배 만배 큰 일을 하겠지요. 외국인 노동자들은 우리 교회에는 안 나오지만, 어느 때를 불문하고 ‘파더, 사고 났어’ 라며 저를 찾아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뛰어나갑니다. 불법 체류자의 신분이므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입원비가 없이 병원으로 옮겨지면, 성직자인 제 보증이 필요할 때도 있죠.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라 싸움도 많이 벌어집니다. 얼마 전 필리핀 노동자가 죽었어요. 감옥에 갇힌 가해자는 빈털터리였어요. 정부 기관에서는 불법체류자의 죽음까지 보상해주려고 하지 않아요. 결국 ‘샬롬의 집’ 운영비로 대신 마련해줬습니다. 이들을 꼭 동정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이들의 처지가 됐다고 생각해보면 별 방법이 없어요. ”

문제는 이들에게 교회에 다니도록 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자의 수는 60여명에서 정지했다. 성직자로서 교세 확장에 소홀한 게 아닐까.

“메카를 향해 하루 다섯 번씩 절하는 이들에게 개종(改宗)을 요구하면 윤리적인 착취가 아닐까요. 가끔은 ‘내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이 일을 한다는 건 알아달라’ 고 말하긴 합니다만, 이들의 신앙을 무시하거나 곡해해서는 안됩니다. 이들을 만나면 ‘아샬라 무알라입굼(알라신이여 가호가 있기를)’ 이라고 인사해요. 그러면 ‘저 이맘(성직자)은 좀 이상하지만 괜찮은 것 같다’ 라고 저네들끼리 속삭입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은 이를 포용하실 겁니다. 옹졸하고, 간장종지만한 하나님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

그가 지은 교회는 빨간 벽돌에 아치형이 아니다. 그의 표현대로 물류창고처럼 생겼다. 예배실 안에 납골당도 만들어 놓았다. 그는 “중요한 것은 교회 건물이 아니라, 그 안에 사랑이 있고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의 숨결이 있느냐는 것”이라고 했다.

바로 이 교회 건물을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슬람식 예배를 보기 위해 빌려달라고 했다. 아무리 같이 사는 관계라지만, 이번에는 교회의 정체성이 걸린 사안이다. 그는 잠깐 고민했다고 한다.

“여기 십자가가 걸려있으니, 먼저 너희 알라신의 허가를 받는 게 어떤가라고 했지요. 그런 뒤 교회 사용을 허락했죠. 이들은 예배는 보지 않고 행사만 했습니다. ”

그는 무의탁 노인 60여명이 기거할 방과 탁아방·목욕탕·납골당·교육실·치료실·게이트볼장 등을 갖춘 ‘샬롬의 집’ 을 또 하나 지으려고 한다. 청사진에는 죽은 이를 위한 냉동시설도 포함됐다. “병원 영안실에 보관하면 하루 3만5000원씩 들어 외국인 노동자의 가족이 찾으러 올 때면 엄청난 비용이 된다”라는 현장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의 부친은 퇴역 군인이다. 그는 가난하게 살았던 유년의 기억을 갖고 있다. 그런 기억은 사람을 양지(陽地)로 향하게끔 하지만, 그는 늘 곤궁한 쪽을 택했다. “세상 사는 방식은 여럿이지만 나보다 좀 못난 사람들을 위해 살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심한 적은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해병대를 제대한 뒤 야학에 뛰어들었고 빈민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원래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성공회대로 옮겼다. 그러나 성직자가 되는 것은 그의 인생 스케줄에 없었다.

“과연 성직자로 살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어요. 여기 주민들이 저를 신뢰하는 것은 아직 근엄한 사제가 덜 됐기 때문이 아닌지. 여하튼 성직자 과정을 밟을 때, ‘교인보다 아래에 살고 평생 집 없이 살아야 한다’ 는 걸 새겼어요. 순환 근무에 따라 여기를 떠나더라도 일반 교회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제가 가장 애틋하게 여기는 정신지체아의 마을로 가고 싶어요. 물론 아내와 중3인 딸아이에게는 미안하지요.”

그러면서 그는 “어떨 때는 성직자는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성공회 신부는 결혼이 허용됨)….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결혼해 삽니다. 그런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면서 나누고 섬김의 생활을 하려면, 결혼을 잘 했다 싶기도 하고. ”

세상을 살아나간다는 것은 성(聖)이든 속(俗)이든 어찌 힘겹지 않겠는가. 이런 기자의 속심을 읽은 것일까. 그는 “그러나 요즘처럼 편하고 즐겁게 산 적이 없어요”라고 뒤집었다.

“삶은 누구에게나 즐거워야 해요. 예수는 축제의 주인공으로서 세상에 왔어요. 고난과 암울함을 주려고 온 게 아닙니다. 즐거움을 주려고 왔습니다. 넉넉한 자만 그런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라, 가난한 자도 즐거워야 합니다. ”

질문을 덧붙였다. “신부님은 언제 가장 즐거웠는가”라고.

“이들과 어울려 술 마실 때가 가장 즐거워요. 아직은 앉은 자리에서 소주 두 병을 비웁니다. ”

성직자의 답변치고는 좀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그는 “부탁건대 별난 성직자처럼 비쳐지지 않도록 해달라”라는 어려운 주문을 했다.

◆‘샬롬의 집’ 이 있는 곳
원래 한센씨병 환자촌…가구공장 들어선후 외국인노동자 몰려

이정호(李貞?) 신부가 사는 곳은 행정구역상 남양주시 화도읍 녹촌리다. 이 마을은 1960년 영국인 선교사들이 전국을 유랑하던 한센씨병 환자들을 불러 모아 형성된 것이다. 선교사들은 5만여 평의 땅을 매입해 이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무상 분양했다. 원주민들은 외부와 격리된 채 양계와 양돈을 치며 생활했다.

세월이 변해 이곳에 가구 공장들이 들어섰다. 원주민 1세대는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났다(현재 500여명 생존). 원주민의 2, 3세의 생계 방편도 공장임대업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들 역시 뿌리깊은 사회적 편견에 시달리고 있다.

영세 가구공장이 밀집되면서 외국인노동자들이 따라 들어왔다. 이제 이곳은 서울 근교에서 가장 유명한 외국인노동자의 밀집촌으로 변했다. 방글라데시, 필리핀, 네팔인들은 끼리끼리 자신들의 동네를 형성하고 있다.

이정호 신부는 최근 지인(知人)에게 띄울 편지를 다음과 같이 썼다.

“조그만 공간을 마련하여 고통받아온 이들에게 위로와 꿈이 되어 주고 싶습니다. 땅은 확보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건축하는 일입니다. 이 집 짓는 일에 여러분의 도움을 요청 드립니다. ”

편지의 마지막 구절은 “금액의 많고 적음을 떠나 이 편지를 받으신 모든 분들은 저희를 도와주셔야 합니다”라고 돼 있다. 연락처는 031-594-5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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