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최대 주이자 GDP 기준, 세계 6위의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캘리포니아에서 전기가 나갔다는 것은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 것'만큼이나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다.

2000년 5월, 전력수요의 급증으로 비롯된 전력비상은 전력수요가 떨어지는 겨울철에는 급기야 정전으로 이어져 4주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냉장고의 음식은 썩어나고 공장의 가동이 중단되는가 하면 미국시민의 최대 스포츠 축제인 슈퍼볼은 가능한 한 이웃과 함께 텔레비전을 시청하라고 주정부가 당부할 정도였다. 심지어 알루미늄 제련회사는 자체 생산을 중단하는 대신 계약된 전력을 다른 데로 내다 팔아 17억 달러를 챙기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후진국에서도 일어나지 않는 일이, 아니면 브라질에서나 일어나던 일이, 세계 첨단산업의 기지인 미국의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전력위기를 두고 많은 진단이 뒤따랐다. 급증한 수요와 신규 발전설비투자의 부진이 가져온 공급의 부족, 가스 비용의 급등, 환경규제의 심화, 심지어는 규제완화의 부진 등이 '제 논에 물대기식'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많은 보고서에서 일치하는 주장은 민간 발전업자들의 시장지배력(market power)을 이용한 담합이나, 아니면 적어도 전략적 행동(strategic behaviour)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와 더불어 그 이면에는 미국에서 가장 야심차게 추진한 전력산업의 규제완화가 있다는 사실도 지적되었다. 전력은 값이 오른다고 해서 안 쓸 수는 있는 게 아닐 뿐더러 저장이 불가능한 상품이라는 특성을 발전업자들이 최대한 활용하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평소에는 MWh당 25달러 수준이던 도매 전력 값이 2000년 12월에는 385달러까지 치솟고 이듬해 5월까지 300달러 대에 머물렀다.

미국에서 에너지의 위기는 캘리포니아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미국 최대의 에너지 기업인 엔론(Enron)사가 파산하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유는 투명경영의 상실과 도덕적 해이, 정치적 유착 등의 추문이 복합적으로 얽힌 것이었다. 일찍이 에너지 산업의 규제완화정책에 힘입어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공공의 영역에 진출함으로써 엔론사는 무서운 속도로 사세를 확장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부실경영에 이은 파산. 뉴욕 타임즈지가 이를 미국정부가 추진해온 에너지 산업의 규제완화가 낳은 전형적인 부작용이라고 지적하고 나섰다거나 미국의회에서 "에너지 산업의 공공성을 감안해 기업공개를 의무화하거나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캘리포니아 사태나 엔론사 파산의 공통된 특징은 에너지 산업의 규제완화가 빚은 재앙이라는 점이었다. 그 파장은 곧바로 에너지 산업의 구조개편에 대한 재검토나 공기업으로의 회귀로 나타났다. 먼저 캘리포니아에서는 주정부가 발전에서 송배전을 포괄하는 공기업체제로 회귀하기로 결정하여 이미 송전선 매입을 완료하였다. 또한 구조개편을 준비하던 인근의 네바다나 알칸소, 뉴멕시코주들은 일제히 구조개편작업을 중단한 채 계획 자체에 대한 재검토에 들어갔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해 발전회사의 분할에 이어 올해에는 발전자회사의 민간매각이 추진되고 있다. 발전산업노조는 이에 반발해 25일부터 파업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해 전력비상을 둘러싼 긴장이 높아가고 있다. 캘리포니아 전력위기의 와중에서 데이비드 주지사는 규제완화정책이 '거대하고도 위험한 실패'이자 '에너지 악몽'이었음을 자인하였다. 그것이 전력공급을 증가시키지 않았으며 소비자 가격을 낮추지도 않았다는 고백도 뒤따랐다. 물 건너 남의 나라 일이니까 오불관언, 우리는 개의할 필요가 없는 일일까? 아니면 '치약은 다시 치약통에 넣을 수 없다'는 치약의 논리를 언제까지나 신봉하며 뒤탈이 없기만을 빌고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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