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구조조정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고 있는 50대 고급 인력들이 화려한 경력과 낮게 제시하는 연봉 수준에도 불구하고, 재취업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L그룹에서 부사장을 역임한 박명섭(가명)씨는 지난해 봄 회사 구조조정 과정에서 실직한 후 아직 재취업을 하지 못하고 있다. 박씨는 미국 아이비리그 명문대학의 MBA(경영학석사)와 미국 공인회계사 자격증까지 갖고 있지만 취업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S그룹 홍콩·중국 지사에서 20여년간 근무한 이인호(가명)씨는 국내에서도 알아주는 ‘중국통’ 이지만 6개월 넘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 이씨는 중국어·영어 회화에 매우 능통하고, 희망 연봉을 전 직장에서 받던 수준보다 50% 낮췄으나, 구직이 잘 이뤄지고 않고 있다고 말했다.

국책은행에서 임원을 지내고 퇴직한 최영일(가명)씨는 작년 가을부터 기업 재무관리 분야에 일자리를 찾고 있으나 아직까지 기업들로부터 ‘함께 일하자’ 는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다. 작년 가을 H그룹에서 대표이사를 지내다 퇴직한 정길수(가명)씨는 중소 제조업체나 무역회사에 재취업, 지금까지 쌓은 노하우를 다시 활용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접촉하는 중소기업들마다 『대기업 사장을 역임한 분이 어떻게 중소기업에서 일할 수 있겠느냐』며 채용을 꺼리고 있다고 한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가 운영하는 「고급인력 정보센터」에는 한달 평균 80~90명의 고급인력들이 찾아와 재취업 신청서를 제출하고 있다. 대부분 중견기업과 금융기관에서 임원과 부장, 지점장 직책을 역임한 고급인력들이며, 회계사·세무사·MBA 등 자격증을 소지한 전문인력들도 상당수 끼어 있다.

그러나 재취업 등록서류를 작성한 후 6개월 이내에 일자리를 구하는 데 성공하는 사람은 전체의 10%선인 8~9명에 불과하다는 게 경총측의 설명이다. 50대 고급 인력들이 재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가장 큰 이유는 ‘나이’ 때문이다.

「고급인력 정보센터」에서 만난 중소기업 S사(사) 박순영 이사는 “최근 경총을 통해 대기업 출신 인력 3~4명을 영입하려 했으나, 경총에서 추천한 후보들이 모두 50대 후반이어서 영입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또 재취업을 원하는 고급 인력들은 대부분 일반 관리직이나 총괄부서 경험자인 반면, 일선 기업들은 마케팅·영업·재무분야 경력자를 채용하기 원하는 등 서로 조건이 잘 맞지 않는 점도 재취업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고급인력정보센터」 김근 소장은 『현재 9000여명의 고급인력들이 재취업 희망서류를 제출해놓고 있다』며 『하지만 신분노출을 꺼려 개인적으로 재취업을 추진하고 있는 사람들까지 합하면 약 2만명의 고급인력이 재취업 전선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기업·금융 구조조정 과정에서 고급인력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불가피하나, 아직 일할 의사와 능력이 있는 전문인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할 경우 엄청난 국가자원 낭비를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노동연구원 최영기 부원장은 “최소 10년 이상 더 일할 수 있는 50대 고급 인력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면 노동력의 손실을 가져와 우리나라의 잠재 경제성장률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삼성경제연구소 김경원 박사는 “재취업 희망자들도 과거의 화려한 경력에만 집착하지 말고 눈높이를 낮추는 자세가 필요하다”며 “연봉은 노동시장의 수급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을 명심해 재취업을 희망하는 고급인력들도 과도한 임금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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