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 다시 비상이 걸렸다.

한국기업평가가 8개 현대계열사의 신용등급을 무더기로 `강등'하면서 시장에 자금 악화설이 재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주가폭락은 물론 일부 계열사의 부도설까지 흘러나오고 있다는 후문이다.

특히 하향조정 배경이 시장신뢰 상실로 지목된 점은 꼭 두달 전 유동성 위기의 악몽을 고스란히 되살려놓은 듯한 분위기다.

현대를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당시보다 상황이 훨씬 악화돼 있는 점이다.

특히 체력을 채 회복하지 못한 현대건설의 경우 이번 하향조정의 여파로 회사채 발행이 사실상 불가능해지는 `극한 상황'에 내몰릴 것이란 우려감이 높아지고 있다.

현대 주변에서는 이번 하향조정이 정부의 계열분리 방침과 `주파수'를 맞춘 것이라는 시각을 내비치고도 있지만 어쨌든 현대의 내재적 `부실'을 우려하는 암울한 분위기가 지배적으로 되고 있다.

◇ 정부 `채찍' 들었나= 현대의 신용등급 강등은 한기평의 `작품'이라기 보다는 정부의 대 현대 압박 수순이라는 해석이 현대 안팎에서 흘러나온다.

정부의 계열분리 원칙을 정면으로 거부한 현대를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집권후기 재벌개혁 드라이브에도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는 인식이 표출된 게 아니냐는 분석이다.

현대 주변에서는 정부가 현대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가자는 데 맞춰져있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를 적절히 압박함으로써 현단계 재벌 구조조정의 최대 화두인 현대자동차 계열분리라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겠다는 계산이 아니냐는 시각이다.

일각에서는 계열분리와 무관하게 현대에 대한 실질해체라는 큰 밑그림을 거론하는 시각도 물론 있다.

◇ 실제 자금위기 가능성은 = 그러나 이번 하향조정이 실제 현대계열사의 재무상태가 건전하지 못한데 따른 `객관적 평가'가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아무리 계열분리 지연이 못마땅하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기업의 병을 고치겠다는 명분을 걸고 기업의 생명을 오히려 끊는 우를 저지를 리는 없다는 분석에 근거하고 있다.

특히`투기등급'으로 강등된 현대건설은 당장 회사채 발행이 어려워지면서 다시금 유동성위기설이 증폭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현대건설 처리문제가 이미 정부차원에서 결정됐다는 흉흉한 소문마저 나오고 있다.

그러나 현대와 주거래은행인 외환은행의 설명대로라면 현대건설의 재무상태는 `이상무'다.

현대건설은 올해 자구계획 3조7천140억원중 지금까지 9천29억원의 유동성을 확보했으며 6월 목표 5천381억원 대비 67.8%의 초과달성률을 보였다는 주장이다.

외환은행이 만기도래한 현대건설의 회사채 1천90억원중 100억원을 재매입해 준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되고 있다.

현대건설 관계자는 "월말에 자금수요가 몰려 다소간의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달초 매각대금이 속속 들어오게 돼 있어 자금사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한기평 평가는정부의 의도가 담겨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 현대 시장불신이 원인 = 정부의 의도가 개입됐건 아니건 이번 하향조정은 시장신뢰 상실이라는 `명분'이 충족돼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관측이높다.

현대는 "잠시 이미지가 나빠졌다고 이를 재무상태와 연결시킬 수 있느냐"고 볼멘 소리를 내고 있지만 시장의 인식이 현대에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에 가깝다.

화를 부른 것은 현대의 자충수라는 분석이다.

현대는 국민에게 약속한 현대차 계열분리 신청시한인 6월30일, `역계열분리'라는 기상천외한 발상을 내놨지만 정부와 여론의 강력한 저항을 받고 이를 백지화시켰다.

정작 문제는 현대가 계열분리무산책임을 정부에 떠넘기면서 `우리는 할 만큼 했으니 정부가 책임져라'는 식의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한 점이다.

계열분리 `원칙'에 따라 정주영 전명예회장의 자동차지분 9.1%를 3% 미만으로 낮추라는 정부의 요구를 드러내놓고 무시한 셈이다.

급기야 전윤철 공정거래위원장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 정몽헌회장과의 담판을 요구했지만 현대쪽은 이렇다할 성의표시가 없다.

결국 `채찍'을 들지 않고는 현대가 움직이지 않을 것이란 정부의 인식이 신용등급 하향조정 형태로 표출됐다는 분석이다.

이렇게 볼 때 현대가 구조조정의 핵으로 떠오른 자동차 계열분리를 조기이행하지 않고는 정부와 시장의 마음을 되돌리기 어렵고 결과적으로 최악의 상황으로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 현대의 대응은 = 현대 관계자들은 이번 하향조정을 `현대 죽이기'로 해석하면서 정부와의 정면대결 의지도 불사하겠다는 분위기가 강력히 표출되고 있다.

자구노력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재무상태가 가까스로 호전되고 있는 현대의 모기업인 현대건설을 `투기등급'으로까지 폄하한 것은 현대의 숨통을 아예 끊어놓으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시각이 팽배하다.

현대 관계자는 "구조조정 지연을 이유로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한 전례가없다"며 "정부의 치졸한 수법"이라고 공격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어떻게 시장을 놓고 배팅을 할 수 있느냐"고 흥분했다.

그러나 전세는 말할 필요도 없이 불리하다.

정부가 신용등급 하향조정 과정에 개입했다는 증거도 없거니와 하향조정배경이 `구조조정 계획 불이행에 따른 시장신뢰 상실'이라는 평가기관 고유의 주관적 해석이어서 대응논리가 마땅치않은 상황이다.

현대의 전망을 더욱 암울하게 만드는 것은 시장이 주목하고 있는 현대차계열분리에 관해 현대가 이렇다할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정 전명예회장의 자동차 지분을 3%로 낮추라는 정부의 `주문'을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한치의 변화도 없는데다 이를 갈음할 `아이디어'도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 정몽헌 전회장의 조기귀국이 열쇠 = 현대 주변에서는 이번 사태의 열쇠는 결국 그룹의 `실질 지배자'로 지목돼있는 정몽헌 현대회장의 조기 귀국에 달려있다는 시각을 보이고 있다.

물론 정 의장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이상 무대응으로 일관할 가능성도 있지만 정부의 압박이 전방위적으로 가해지는 상황에서 정 의장도 수수방관할 수 만은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특히 공정위원장이 계열분리 문제의 카운터파트로 직접 지목하고 담판을 요구한 상태에서 정 의장이 직접 사태해결에 나설 것이라는 목소리가 현대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현재 대북사업 외자유치와 관련해 일본출장중인 것으로 알려진 정 의장은 이번 주말께 귀국할 것으로 전해졌으나 국내사정이 다급해지면서 조기귀국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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