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끼워맞추기식 구조조정" 반발…"인원감축으로 지급여력비율 해결안돼"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이 하고, 직원들에게 희망을 주기보다 절망과 좌절을 제시하는 이 회사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19일 경기대 강당 입구에서 만난 흥국생명노조 이범준 위원장. 날씨가 풀렸다고 하지만 아직 하얀 입김이 나올 만큼 쌀쌀한데도 이위원장은 얇은 셔츠 위에 투쟁 조끼하나 '덜렁' 걸쳤다. 전국 118개 각 지점에서 올라오는 조합원들과 한 명, 한 명 악수하고 인사하느라 분주한 까닭인지 추위도 잊은 모양이다. "잘 있었나?" "하모요∼" 각 지방 사투리를 걸쭉하게 사용하며 전남, 대구, 부산 등 전국에서 올라온 조합원, 비조합원들은 붉은 머리띠와 투쟁 조끼를 받아 들고 강당으로 들어간다. '일방적 구조조정 분쇄를 위한 비상총회 및 투쟁결의대회'를 위해서다.

태광그룹 계열사인 흥국생명은 성탄절을 앞둔 지난해 12월21일 '경영상 긴박한 사정에 의한 인력 구조조정'을 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노조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파업 일정을 포함, 투쟁을 본격화하고 있다. 사무금융연맹(위원장 김형탁)도 흥국생명의 정리해고는 터무니없을뿐더러, 이례적인 금융권 정리해고에 우려를 표시하며 연맹 차원의 투쟁 본부를 구성, 적극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태광그룹(대표이사 이호진)이 정리해고라는 '폭탄'을 사이에 두고 노조가 83일간 파업을 벌였던 울산 태광산업 이후로, 다시 한번 계열사 노동자들과 대립 선상에 놓이게 됐다.

■ "회사의 정리해고 문제있습니다"…"노사간 합의는 깡그리 무시되고…"
"향후 2년 이내에는 인위적인 구조조정을 실시하지 않는다."
지난해 5월16일 흥국생명노사가 명예퇴직 등 250여명의 노동자들을 떠나보내며 맺은 합의서 내용이다. 노사가 어렵게 작성한 합의서는 불과 7개월만에 결국 '휴지조각'이 됐다.

"서로 지키겠다고 한 약속이 일방적으로 무시되고 있습니다. 고통분담이요? 이제는 회사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 도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흥국생명은 최고 3,400명에 이르던 직원들이 지난 98년 이후 희망퇴직 등으로 현재 1,400명만 남아있는 상태다. 2,000명의 노동자들이 10년 넘게 일한 사업장을 떠나면서 얻어낸 고용안정 합의서인 만큼, 노조의 반발은 더욱 거세게 느껴진다.

노조는 회사의 '약속파기'에도 배신감이 들지만 흑자 기업인 흥국생명의 '정리해고'에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다.

2001년 9월 자료에 의하면 흥국생명은 자본금 110억, 총 자산규모 3조6천억 수준의 국내 5위의 생명보험사다. 97년 146억, 98년 60억, 99년 59억, 2000년 267억 등 IMF 상황에서도 지속적으로 흑자를 실현한 '알짜배기' 기업. 그러나 흥국생명은 "지난해 3월 129.3%를 보였던 지급 여력 비율이 9월에는 118.6%로 낮아졌고 2002년 3월 57.2%, 2003년 33.7%, 2004년에는 4.1%로써 1,371억원이 미달될 것으로 추정된다"며 "현 상태의 인력구조 등을 유지한 채 영업을 계속하는 경우에는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구조조정 계획을 밝혔다.(지급여력비율이 100%에 못 미치면 적기시정조치-부실금융기관-퇴출 등의 수순으로 보험사가 정리되게 된다.) 즉 현재 긴박한 경영상 이유가 아닌, 앞으로 추측되는 경영상 어려움을 대비해 '인원감축'을 하겠다는 것이다.

"고용안정 합의서를 작성한 5월과 7개월이 지난 12월, 흥국생명 상황이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는데 이제 와서 지급여력 문제를 정리해고 사유로 들고 나온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범준 위원장의 말이 이어진다.
"게다가 지급여력 달성은 흥국생명 뿐 아니라 생명보험업계가 동일하게 겪고 있는 문제입니다. 직원들 숫자 줄이는 것으로 결코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연맹에서도 지급여력비율을 근거로 하는 인원감축이 타보험사로 확산될 수 있다며 크게 우려하고 있다. 이에 대해 회사 한 관계자는 "5월 고용안정 합의를 했지만 흥국생명 여건이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는 상태"라며 "지급여력을 맞추기 위해 구조조정을 통한 비용절감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노조는 또 이번 구조조정이 '끼워 맞추기 식'이라고 강하게 비난한다. "회사는 2001년 9월말 지급여력 비율이 118.6%라고 했지만 거짓말입니다. 비율을 속이면서까지 정리해고만을 밀어 부치려고 하는거죠." 실제 흥국생명의 2001년 9월말 금융감독원에 보고된 지급여력비율은 170.9%로 52.3%의 차이를 보였다. 이와 관련 회사의 또 다른 관계자는 "'재보험 출재분' 인정 유무에 따라 지급여력비율 '%'가 달라진다"며 "감독원이 그 당시에도 그랬지만 올해부터 '재보험 출재분'을 인정하지 않기로 해 회사로써는 '출재분'을 뺀 상태에서 계산을 해 차이가 생긴 것"이라고 해명했다.

■ "이번 정리해고는 울산 태광산업과 같은 시나리오다"
"태광그룹이 지난해 11월 정리해고와 노조무력화에 성공한 울산 태광산업 사례로부터 한껏 고무돼 있습니다.
동일한 시나리오로 흥국생명노조를 약화시키고 마음대로 해보겠다는 거죠.
결국 이 모든 건 흥국생명 대주주이자 태광그룹의 실질적인 오너인 이호진 대표이사의 계획일 겁니다."

울산 태광대한화섬과 흥국생명의 정리해고는 묘하게도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태광그룹 계열사이면서 상급단체가 민주노총이라는 점이다. 10개가 넘는 계열사 중 민주노총 사업장은 4곳. 이중 태광과 흥국생명 노조는 쉽게 말하자면 '강성 노조'로 분리된다. 흥국생명노조는 생명보험 업계 노동자들이 집회 한번 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지난 93, 99년 두 차례 파업을 벌인 바 있다. 또 고용안정 합의서를 작성한 후 불과 1년도 안된 상태에서 '정리해고'를 하려 한다는 것도 동일하다. 인원감축의 이유도 최근 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향후 발생할 경영상의 어려움을 대비하겠다는 다분히 '공격적인 구조조정'이라는 점에서 닮아 있다. 공통점은 계속 이어진다. "정리해고 숫자보다 희망퇴직 수를 늘리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고용안정 합의서가 있기 때문에 회사가 법적으로 불리하기 때문이죠." 서울에서 일하는 한 조합원의 이야기는 이를 증명한다. "지점 관리자가 저보고 인원감축 대상자라고 하더군요. 기분이 참… 자기가 대상자라는 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혜택을 받기 위해 희망퇴직을 선택하게 되죠. 희망이 아니라 강제퇴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울산 태광에서도 전체 정리해고 명단이 통보된 후 희망퇴직을 계속해서 받았고 이런 저런 부수적인 원인도 있었지만 '선 정리해고 통보'가 507명 인원감축 중 희망퇴직 395명이 나온 주요한 이유로 작용한 건 사실이다.

■ 2월21일 정리해고 통보…노조, "승리하는 투쟁 할 것"
"전 '비대상자'이지만 투쟁에 끝까지 참여할 겁니다."
대구에서 올라온 한조합원은 지난 5월 명예퇴직 당시에는 자신도 '대상자'였다며 결국 '우리모두의 문제'라고 말한다. 이날 총회에는 750여명의 조합원 중 250여명이 참여했다.
"현장에서 많이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비대상자'인 경우 괜히 참여했다가 대상자가 되는 것은 아닌지 겁을 내고 있구요."
광주에서 올라온 이 조합원은 격주휴무로 쉬는 날이라 '몰래' 참여한 것이라며 이름 밝히기를 꺼려했다.

"회사는 아무런 명분도 법적 우위도 없습니다. 비전 없이 좌우출동 무너져 가는 회사지만 그래도 우리 청춘을 걸었던 회사입니다. 꼭 승리하는 투쟁을 할겁니다."
노조 이범준 위원장은 비상총회 자리에서 마이크를 꽉 부여잡고 장시간 말을 잇는다. 이 모습과 겹쳐지는 대목이 있다.
"올해를 신노사문화 정착의 해로 만들어가야 하겠습니다. 과거의 대립적이고 병폐적인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서로가 협력적인 상생 관계를 유지…"
태광그룹 이호진 대표이사의 신년사. '새해에 마음먹었던 대로만 행동해라'는 말이 있듯 과거의 대립을 뛰어넘는 신노사문화를 위해서는 흥국생명의 대주주인 이호진 대표가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좀더 귀 기우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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