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21일 서울 종로의 한 음식점.50세 안팎의 중년 20여명이 모였다.

꽁꽁 얼어붙은 경기 탓인지 송년회 분위기는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앞으로 1~2년 더 다닐 수 있을지 몰라"라고 누군가가 입을 뗐다.

"이제 큰 놈이 대학 들어갔는데. "라는 한탄소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새어 나왔다.

다른 때 같으면 "내년초 정기인사 전망"이나, "정기주총 임원 후보" 등이 안주감으로 오를만 한데도 이날 송년회는 "앞날에 대한 우려"로 시작해 "제2의 인생에대한 준비는 빠를수록 좋다"는 공감대로 끝을 맺었다.

이날 모임은 "제일은행 1979년 대졸행원 입행동기 송년회". 당시 82명이 입행했으나 지금은 3분의 1가량인 28명만 남아있다.

"눈물의 비디오"로 유명했던 지난 1998년에 입행동기 대부분이 차장 타이틀을마지막으로 은행을 떠났다.

살아남은 이들 대부분은 1952년생이나 1953년생. 우리 나이로 이제 막 50이 됐거나 50을 눈 앞에 둔 사람들이다.

직책은 본점 부서장과 지점장이 대부분. 말그대로 은행의 중심축들이다.

그러나 이들에겐 "은행의 별"이라는 임원 승진 등에 대한 희망보다는 장래에 대한 불안감이 더 무겁게 자리잡고 있었다.

외환은행에서 지점장을 하는 K씨(53). 그는 올들어 요리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주말을 이용해 일식요리를 배우고 있는 것.1975년 은행원 길에 들어선 뒤로 배운 것이라곤 "숫자놀음"밖에 없다는 그에게 "사시미 칼질"은 낯설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요리학원에 기를 쓰고 다니는 것은 퇴직이 목전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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