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전 서울 역삼동 평화은행 회의실. 임시주주총회를 위해 정부 대표와 임원들이 모였다.

은행 부문을 한빛은행에 합병시키고 카드 부문은 우리카드사로 독립시키는 안건을 승인했다. '노동자 은행'을 내세우며 올린 간판을 출범 9년 만에 내리는 순간이었다.

평화은행의 역사는 1987년 대통령 선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민주정의 당 노태우 후보는 노동계 표를 의식, 노동자 전담 금융기관을 세우겠다고 공약했다.

실행에 옮겨진 것은 다음 대통령 선거가 임박한 92년 11월. 자본금 3천억원을 목표로 했으나 일반 근로자의 참여가 부족해 일부 대기업의 지분을 늘려 출범했다. 이런 태생적 한계때문에 근로자 은행이라기 보다 14번째 시중은행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평화은행은 출범 초기 근로자를 상대로 한 소매금융에 치중해 '은행 문턱을 낮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비슷한 시기에 출범한 대동. 동남은행보다 실적도 좋았다. 하지만 대기업 여신이 늘어나면서 위기의 씨앗이 뿌려졌다는 지적이다.

출범 때부터 평화은행에 몸담아온 한 직원은 "시중은행으로서 면모를 갖추기 위해 어느 정도 기업 대출을 하는 것이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결국 외환위기를 맞아 기업 여신 부실때문에 휘청거렸다.

당시 '근로자 은행은 없앨 수 없다'는 노동계의 측면 지원에 힘입어 1차 퇴출위기를 넘기면서 2천2백억원의 공적자금을 수혈받았다. 하지만 대우사태의 직격탄을 맞아 2000년 2차 금융 구조조정에서 자본금을 완전 감자(減資)당하고 정부 주도 우리금융지주회사에 통합됐다.

게다가 올 초 고려산업개발 부도와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에 휘말리며 우리금융에 편입된 4개 은행 중 유일하게 정부와 맺은 경영개선약정을 지키지 못해 진통 끝에 간판을 내리게 된 것이다.

합병은 연말까지 완료되지만 독립사업부 체제를 유지하기로 했기 때문에 평화은행의 각 지점은 당분간 유지될 전망이다.

평화은행 고객이 한빛은행에서 거래하는 것도 전산 통합이 이뤄진 뒤에 나가능하다.

우리금융 관계자는 "아직 통합 일정이 확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독립 카드사도 연내에 설립될 수 있을지 불투명한 상태다.

87년 노태우 후보의 대선 공약으로 생긴 은행은 평화은행 외에도 이북 5도민을 주주로 한 동화은행, 지역 중소기업을 위한 대동. 동남은행 등이었다.

이들은 평화은행보다 앞서 89년에 설립됐는데 모두 98년 6월 29일에 퇴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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