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기업의 활동에 대한 비판과 우려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다국적기업에 대한 '관심'은 이들이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과 다양한 특혜로 이어지는 정부와의 불투명한 '거래'로 시작된다. 그리고 다국적기업의 생산 또는 영업 활동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과 다국적기업의 노동 기준 준수와 노동권 존중 여부도 중요한 관심과 감시의 대상이 된다. 바로 이러한 주요 관심 지점에 대한 국제적 기준이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 다국적기업의 행동에 대한 국제규범, 'OECD 다국적기업 지침'


OECD는 2000년 6월 "OECD 다국적기업 지침 (OECD Multinational Enterprise Guidelines)"을 개정하였다. 이 '지침'은 OECD 회원국 정부들이 다국적기업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떤 규범을 지켜야 되는지 등 행동과 행위에 관한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OECD 회원국 정부들이 다국적기업에게 요구하는 행동 규범은 정보 공개, 고용과 노사관계, 환경, 뇌물 거래, 소비자 권리, 과학기술, 경쟁 그리고 조세 등의 분야를 포괄하고 있다.

사실 다국적기업의 행동에 대한 국제 규범 또는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최초의 국제 규범은 1976년 OECD에 의해 채택된 "지침"으로 2000년 6월 개정된 "지침"의 원본이다. OECD 회원국 차원에서의 다국적기업에 관한 논의는 UN로 옮겨졌다. 이 논의는 다국적기업에 대한 구속력 있는 "국제법"을 탄생시킬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1980년 대 초에 들어 무산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 국제노동기구는 1977년 총회에서 "다국적기업과 사회 정책의 원칙에 대한 선언"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구속력이나 실효성 없는 '선언문'에 그치고 말았다.

■ 미국의 ITT 칠레군사 쿠데타에 개입…다국적기업 지침 탄생

최초의 국제 규범으로 채택되고 다국적기업에 관한 국제적 논의의 첫 장이 되었던 OECD의 1976년 "지침"은 당시 거대 다국적기업이 "노골적"으로 개도국 국가의 정치에 개입한 것이 밝혀지면서 거세진 사회적 비판에 대한 OECD 회원국들의 대응으로 이루어졌다. 다국적기업의 횡포와 권력을 통제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과 여론은 1970년대 미국의 ITT가 칠레의 군사 쿠데타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지침"이 채택된 1970년대 중반부터 말까지 노동조합들이 이 지침에 마련되어 있는 "제소" 기능을 활용하여 다국적기업의 행동에 대해 압박을 가하여 변화를 강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 이 지침은 유명무실해져 버렸다. 이는 각국 정부들이 다국적기업을 책임있는 '시민'으로 행동하도록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경쟁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명무실"한 OECD지침이 2000년 6월 회원국 정부들의 합의로 개정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은 199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다국적기업과 초국적 자본에 대한 대중적인 비판과 분노 때문이다.

OECD와 회원국들이 다국적기업과 초국적 자본 그리고 선진 산업국의 요구에 부응하여 채결하려던 다자간투자협정(MAI)이 회원국들 내부의 정치 과정과 새로운 국제적 "행위자"로 등장하기 시작한 "반신자유주의 세계화" 세력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자 OECD는 신뢰성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OECD와 회원국 정부들은 이러한 "신뢰성의 위기"는 다국적기업과 초국적 자본의 힘이 거대해지도록 방치한 데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되어 다국적기업의 행동과 태도를 개선하기 위한 규범을 만드는 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즉 OECD는 개별 다국적기업의 비합리성을 보완 극복하는 총자본의 합리성 담지자로 나섰던 것이다!)

OECD는 자신의 정통성을 회복하고 다국적기업의 행동에 관한 규범의 신뢰성과 실효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지침 개정 작업에 노조와 환경, 부패 등을 행동 영역으로 삼는 시민사회 단체 등과 협의하였다.

■ 다국적기업 지침 위반 노조가 제소할 수 있어…자회사, 하청업체 노사문제도

1976년 채택된 "지침"과 달리 개정된 "지침"은 이행과 준수를 위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절차와 장치를 제공하고 있다. 지침의 이행을 감독하고 지도하는 주체로 "국가별 연락 사무소(National Contact Point·NCP)"를 설치하도록 하고, 정부에 기업들이 지침을 준수하도록 하는 책임을 부과하고 있다.

노조, 시민사회단체, 개인, 국제 단체 등은 특정 다국적기업이 지침의 내용을 위반했다고 판단할 경우 이를 해당 국가에 설치된 "국가별 연락 사무소"에 제소할 수 있다. 이렇게 제소가 이루어지면 NCP는 제소 내용에 대해 조사를 하여, 해당 기업을 불러 제소 당사자와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도록 "대화"의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정부가 주선한 자율적 대화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정부는 그 기업에 대해 "권고안"을 공개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개정된 지침은 OECD 회원국이 아닌 나라에서 활동하는 다국적기업에 대해서도 제소를 할 수 있는데, 이는 해당 다국적기업의 모국에 설치된 NCP에 하면 된다. 만일 한 다국적기업이 여러 나라와 관련이 있다면 연관된 모든 나라의 NCP에 제소할 수 있다.

개정 지침에는 이러한 새로운 이행 절차와 장치 외에도 보다 진전된 규범을 담고 있다.

다국적기업의 자회사나 하청 업체에서 발생하는 노사관계의 문제(또는 다른 어떤 지침으로 규정된 영역에서의 문제)에 대해 모기업에 대해 제소할 수 있게 하였다. 일련의 생산과 공급망 내에서 활동하는 모든 기업들의 행위에 대해 그 망의 지배적인 기업이 통제해야하는 책임이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노조 활동에 필수적인 노동3권과 고용에서의 차별 금지를 보장하고 있으며 아동노동과 강제노동을 금지하고 있다. 기업에 정보 공개의 의무를 부가하고 있으며, 특혜를 받기 위한 뇌물 제공을 금지하고 있고, 환경 보호에 대해서도 책임을 규정하고 있다.

OECD 회원국 정부는 이 지침에 대해 기업과 사회 전반에 홍보할 의무가 있으며 문제가 발생할 경우 해결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이에 따른 한국 정부의 공식 홍보 자료 보기).

■ 다국적 기업지침, 구속력은 없으나 활용도구 될 수 있어

OECD 다국적기업 지침은 다국적기업의 다양한 생산 또는 영업 거점에 있는 노동자들과 노동조합, 그리고 다국적기업의 환경 파괴와 세금포탈 등의 문제를 다루는 다양한 사회운동과 소비자운동 세력에 새로운 무기를 제공하고 있다. 이 지침은 "구속력"은 없지만, 다국적기업의 브랜드 가치의 중요성과 이에 따른 "여론 취약성"을 "약한 고리"로 활용할 수 있는 도구가 될 것이다.

다른 기회에 지침의 구체적인 내용과 활용 방안 그리고 활용 현황에 대해 소개할 계획이다. 현재 한국에서도 프랑스 유명 유통업체, 미국 유명 운송 업체에 대한 제소가 검토 중에 있으며, 스리랑카 수출자유지역에서 생산활동을 하고 있는 스리랑카 노조가 민주노총의 소개로 한국기업에 대한 제소를 하였고, OECD 회원국의 노조 협의체인 TUAC이 과테말라에 있는 2개의 한국 기업에 대해 한국 NCP와 미국 NCP에 제소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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