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성조합원 남편들로 구성…"남편이 함께 있으니까 든든해요"



회사의 안산공장이전 방침에 반발, 파주공장으로의 이전을 요구하며 180여일의 철야농성과 90여일의 전면파업을 벌이고 있는 금속노조 한국시그네틱스지회. 대부분의 장기투쟁 사업장처럼 장기농성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가족대책위원회가 큰 힘이 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한국시그네틱스노조 가족대책위원회는 그 구성부터 좀 특이하다. 남성중심의 사업장에서 파업을 지원하기 위해 부인들을 중심으로 가족대책위원회가 종종 꾸려지고 있으나 이 사업장에서는 대부분의 여성조합원들이고 조합원의 남편들이 가족대책위원회를 꾸려 조합원들의 정신적 후원자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 "처음에는 달래서 집에 데려가려고 모였다"

"조합원들이 여자다 보니 많이 혹시 다치지나 않을까 많이 걱정했었죠. 그래서 처음에는 파업하는 것에 반대하고 안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가족대책위 김아무개씨의 생각은 파업에 참가하는 아내를 둔 대부분의 남편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8월9일 용역직원과 구사대가 동원돼 염창동 공장에서 조합원들을 몰아내고 기계를 반출과정에서 폭력이 동원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남편들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80년대에나 있을 법한 용역깡패를 직접 보니까 지금 세상에도 이런 일이 아직도 벌어지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달라진 것 하나도 없는 세상에 대해 화가 났죠." "일상에 빠져 틀에 박힌 울타리 안에서 살면서 그동안 모르고 살았는데 그런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던 거죠. 사회의 진면목을 본거죠"

아내들과 대화를 나누고, 시그네틱스지회 투쟁을 지원하고 있는 금속산업연맹 이석행부위원장과 술한잔을 기울이면서 생각의 반전은 구체화되고 남편들은 새로운 실천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용역깡패와 구사대에게 내 아내가 끌려나가는 거 보고 이 사람들의 신념을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사람들 생각이 정당한데 사회가 노동하는 사람들의 뜻을 꺽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혼서류 만들어 놓고 끌고 갈려구 왔다가 조합원들 모두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열심히 하는 거 보면서 점점 지속적으로 도와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특히 지난 9월말 파주공장 농성과 관련해 체포됐다 구속적부심을 통해 석방된 한 조합원 남편은 "이부위원장하고 둘이 앉아 소주 13병을 비우는 동안 코꿴거죠"하며 웃었다.

■ "가정의 평화를 위한 파업 지원"

이렇게 구성된 가족대책위에 참여하고 있는 남편들은 파업을 도와주면서 가부장적이던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된 것을 가장 좋은 점으로 꼽았다. 농성장에서 의사결정방법이나 토론하는 모습 등 민주적 절차를 직접 경험하다 보니 봉건적이고 일방적이던 가족관계가 대화도 많아지는 등 개선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족대책위원회의 설립목적은 '가정의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가족대책위에는 현재는 25명 정도의 남편들이 정기적인 모임에 참석하고 있고 15명이 매일 파업현장을 방문하고 있으나 다른 가족들의 참여도 적극 유도해 모임을 발전시켜나갈 계획이다.

모임에 진행되면서 노동조합 자체에 대한 관심도 늘어났다. 노조를 경험한 남편들은 1∼2명에 불과했으나 모두들 "우리직장에도 노조 만들고 싶다"며 설립방법을 금속산업연맹 이석행부위원장에게 문의하기까지 한다.

■ "남편이 농성장에 와있으니 든든해요"

가족대책위는 나름대로 가진 직업에 따라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을 찾았다. 밤이면 추워지는 날씨를 염려해 수위실을 개조해 보일러를 직접 설치해 주기도 하고 재정사업에 물품을 연계해 주기도 하며 사진인화를 해주는 남편도 있다.

그러나 남편들의 가장 큰 역할은 농성장이나 집회장에서의 존재자체로 조합원들에게 큰 힘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노조 간부는 "남편들이 와 있으니까 조합원들이 자신감 있어하고 든든해 한다"고 말한다. "하루 안나가도 조합원들이 무슨 일 있냐고 찾는다. 눈에 보이면 든든해하고 안보이면 불안해 한다." 가족대책위도 "커다란 걸 도와주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의 위안을 주자는 생각"이라며 가능한 시간에는 농성장을 지키거나 집회에 참석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직장나가는 시간외에는 조합원들과 늘 함께 한다. 같이 철농하고 아침에 바로 출근한다. 일요일도 여기 나오다 보니 자기시간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여기와 있는게 마음이 제일 편해요." 농성장을 지키는 남편들의 마음이다.

9월말 가족대책위 한 명이 체포된 것은 조합원들보다 가족들의 분노를 이끌어 내 가족대책위의 결속력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한명 구속시키면 와해될 줄 알았나본데 오히려 결속력을 더 좋아져 남편들의 참여도가 더 높아지고 있다." 게다가 "이제는 아내가 그만둔다고 해도 나는 계속하겠다는 남편들까지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대책위원회는 노조의 이번 투쟁이 마무리되더라도 친목계를 만들어 미약하나마 노동단체들을 후원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여자보다 투쟁하는 아내가 아름답다"는 그들. 이제는 아내의 투쟁을 넘어 그들 스스로가 새로운 역할을 찾아나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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