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때 쓰기 딱 좋은 표현이 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일.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입법권을 남용하여 헌법정신을 서슴없이 짓밟는 국회에게 정치개혁을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 애당초 문제였다. 지난 9월24일 국회 법사위가 선거법을 슬그머니 개정했다. 당시는 한창 국정감사가 진행되던 중이었고, 여야는 이른바 '이용호 게이트'로 싸움질을 벌이던 상황이었다. 서로 으르렁거리던 여야가 선거법개정안을 사이좋게 통과시킨 것은 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여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개정된 내용은 국회의원 선거기탁금 2,000만원을 1,500만원으로, 기탁금 반환조건을 유효투표 총수의 20%에서 15%로 인하 조정한 것이다. 이는 지난 7월19일 현행 기탁금이 "돈으로 피선거권을 제한"한 것이라며 위헌판결을 내린 헌법재판소의 권위를 짓밟는 폭거로서, 법을 지킬 의사가 전혀 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문을 보면 기탁금이 왜 문제인지가 드러난다. 2,000만원 기탁금은 2000년 2월16일 선거법을 개정하면서 당시 1,000만원을 두 배로 올린 것이다.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1,000만원도 과도하다고 지적하면서 폐지하지 않고 오히려 기탁금을 올린 정치권을 비판하였다. 위헌 사유는 "과도한 기탁금액은 당선가능성이 있는 서민적이고 진보적인 인사들의 후보 등록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어렵게 하는 것으로써 선거에 참여하려는 자를 경제적 능력에 따라 차별하여 '돈이 없는 자'로 하여금 국정에 참여할 기회를 근본적으로 박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2,000만원을 1,500만원으로 내린 것은 기탁금을 내리는 시늉을 함으로써 위헌요소를 피해가려는 얄팍한 짓이다. 1,000만원도 과도하다는 헌재의 지적을 모르쇠하는 것이다.

20%를 15%로 낮춘 기탁금 반환조건 개정 또한 국민을 우롱하는 짓이다. 헌재는 득표율 20%인 기탁금 반환기준이 너무 높다고 지적하였다. "기탁금 반환에 필요한 기준을 지나치게 높게 책정하여 선거와 국정에 참여할 기회를 가로막는 것"으로서 "민주주의의 본질에 위배"된다는 게 헌재의 판단이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2∼3개의 거대정당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군소정당이나 신생정당 후보자의 경우 100분의 20이라는 기준을 초과하기가 힘들게 될 것이므로 결국 이들 군소정당이나 신생정당의 정치참여 기회를 제약"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치권은 기탁금과 반환기준을 대폭 내리지 않는 이유를 '후보의 난립을 막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후보 난립이라고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한 지역구에서 후보가 몇 명이 출마하면 난립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정상적인 선거가 치러지지 못할 정도로 후보가 많은 일이 있었는가. 참정권이 국민의 기본권이라면 국정운영에 참가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기회를 최대한 보장해주어야 할 것이다. 또 유권자의 입장에서도 후보가 많으면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것 아닌가. 정말로 후보가 난립하여 선거를 혼탁하게 한다면 선거법을 엄정하게 집행하면 된다. 유권자들이 알아서 가장 좋은 후보를 뽑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면 된다. 후보 난립을 왜 하필이면 돈으로 제한하려 하는가. 정작 돈으로 선거를 혼탁하게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2,000만원이 전혀 장애물이 될 게 없다. 오히려 깨끗하게 선거를 치르려는 사람들만 기탁금 때문에 참정권을 박탈당하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기탁금과 반환기준을 어느 정도로 하는 것이 적절한가. 국제적으로 확립된 객관적인 기준은 없다. 기탁금과 반환기준 모두 없애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정말로 필요하다면 지금보다 대폭 낮추어야 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평균적인 직장인들이 받는 한달치 임금 정도의 기탁금은 참정권을 제약하지 않을 것이다. 반환기준도 5% 정도로 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유권자인 국민이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는 좋은 기회로서 국민 정치 참여의 중앙 통로(main-street)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권은 기탁금 액수와 반환기준을 대폭 낮출 뿐만 아니라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도입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2004년 총선까지 질질 끌면 안 된다. 당장 내년 초의 지방선거에 적용될 수 있도록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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