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침탈, 결코 잊지 못해"…아직도 악몽에 시달려

민주노총 주력사업장으로 부쩍 성장…"우리도 놀라워요"

"결코 그 날을 잊지 못할 겁니다. 우리가 버틸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날의 참혹함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롯데호텔노조 조합원들은 벌써 파업 36일째를 맞고 있다. 그리고 지난달 29일 새벽 '테러진압'을 능가하는 공권력 침탈로 갈 곳을 잃고 뙤약볕 아래서 보낸지도 보름이 됐다. 그러나 이들은 한결같이 지치지 않았다고 입을 모은다. 교섭을 회피해 파업으로 치닫게 만들고, 경찰병력 침탈로 만들어진 씻을 수 없는 상처들이 모두 치유되지 않는 한은 결코 물러설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이다.

* '마른 장마' 속에서 고난의 행군

롯데호텔노조 조합원들은 호텔에서 쫓겨난 후 곧바로 명동성당으로 집결했다. 정말 갈 곳이 없었다. 소공동 롯데호텔 주변은 경찰들의 철통같은 수비로 근처에는 아직도 얼씬도 할 수 없다.

노조는 정주억 위원장 등 7명이 구속되자, 곧바로 김경종 부위원장을 위원장 직무대행으로 세우고 파업대오를 추스리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공권력에 의해 해산됐을 때는 다시 뭉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롯데조합원들은 주변에서 놀랍다는 반응을 보일 정도로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다.

그동안 이들의 일과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매일 아침 9시까지 명동성당 앞으로 집결, 오전 10시경부터 집회를 갖는다. 지난 한 주 동안에는 오후마다 민주노총의 '청와대 진격투쟁' 등 공권력투입 항의 투쟁에 참여했다. 가깝게는 롯데호텔 건너편, 멀게는 과천 정부종합청사까지 가야 한다.

유난히 더운 올 7월, 그동안 '마른 장마'라는 찜통 속에서 이들은 하루종일 그 뙤약볕 아래서 목이 터져라 절규하고 있었다. 회사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리고는 저녁 8시경 지친 몸을 이끄고 "내일 보자"며 집으로 향한다. '거리의 생활 청산'이라는 기약할 수 없는 기대를 품은 채….

* 우리가 투사가 된 이유

지금 볼 수 있는 그들의 이미지는 뜻밖이다. 롯데호텔노조라면 올 2월 선거에서 민주노총 계열의 현 정주억 집행부가 들어선 지 얼마 안되는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민주노조진영 내에서 최대로 조명받는 위치에 와있다. 그만큼 거대재벌과 정부를 상대로 한 이들 투쟁의 향배가 당장 하반기 닥칠 노동정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날, 공권력 침탈이 있던 날을 도저히 잊을 수 없기 때문이예요. 회사가 우릴 버린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를 그런 사지로 밀어넣을 수가 없지요." 식음료부에서 6년간 근무해온 윤아무개씨(여·30)의 말이다.
현재 36일째 파업에 동참하고 있는 조합원들은 1,100여명. 계약직 참여자들이 일부 돌아간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남아 있는 셈이다. 이들 중 여성조합원은 48% 정도. 이 중 놀랍게도 절반이 기혼자다.

"현재 11개월짜리 아이가 있어요. 다행히 친정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겨놓을 수 있어서 매일 이곳으로 나올 수 있죠."

식음료부에서 윤씨와 비슷하게 근무해 온 박아무개씨(여·30)는 가족들이 "언제 끝나는거냐"라고 물을때나, 저녁에 지친 몸으로 돌아가 제대로 아기를 돌봐주지 못할 때가 가장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가족들이 이해해줘요. 가족·친지·친구 등 주변의 사람들은 대부분 회사측이 너무하다고 하고 있으니까요."

역시 기혼자로 13년째 근무해온 홍아무개씨(여)는 요즘 꿈에서도 그날 호텔 36, 37층에서 있었던 일이 나타난다고 한다. "어제도 쫓기는 꿈을 꿨어요. 당시 경찰은 20분간 머리를 박으라고 해놓고 계속 구타를 했어요. 특히 아줌마 조합원들에게는 남자들 때리듯 그렇게 심하게 발길질하고 곤봉으로 내려치고…. 아직도 눈에 선해요."

* 잘못된 호텔, 바뀌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

이들이 전면파업에 나설 수 있었던 데는 호텔측의 불합리한 임금·인사, 성희롱이라는 잘못된 직장문화 등 아주 근본적인데 있었다는 한결같은 지적이다.

식음료부에서 10년간 근무해온 유아무개(남·34)씨는 "전 지난 10년동안 한차례도 진급하지 못했어요. 평소 지배인에게 종종 불만을 토로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반면 근속연수가 훨씬 적어도 회사에 잘 보이면 진급이 되곤 해요. 한마디로 인사에 있어 전혀 일관성이 없지요"라고 참았던 불만을 터트렸다.

이들 조합원들 불만은 대체로 비슷하다. 이들에 따르면 롯데호텔은 IMF 당시 상여금 절반 반납 후 서명을 강제했다. 인원도 기존 3,000명에서 1,400명 수준으로 대폭 줄이면서 인력이 턱없이 부족해 과중한 업무에 시달려왔다. 또 연장근로수당도 없애고, 탄력적 근무제로 변경해 근무시간이 들쭉날쭉했다.

그러나 남들이 IMF로 고생하고 있을때 호텔은 달랐다. 오히려 매출신장이 대폭 있었지만 회사는 직원들에게 야박하게 굴었고 조합원들은 불만이 쌓일대로 쌓였다. 게다가 이번에 직장내 성희롱 사태가 불거지면서 불신이 심화됐다는 설명이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순순히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눈을 떴어요. 더이상 이전의 비인간적인 직장은 안됩니다. 바꿔야 합니다."

* 36일만의 휴가…모처럼 가족의 품으로

14일은 파업 36일만에 첫 휴가를 받는 날이다. 그동안 단 하루도 쉬지 못한채 매일 강행군을 해왔기에 노조가 하루 휴가라는 말을 하자마다 환호성을 치며 좋아라한다. "너무 좋아요. 처음 쉬는 거예요. 모처럼 지친 몸도 가누고, 가족들과 함께 보내게 됐어요."

하지만 하루 쉬고나서 롯데호텔노조와 조합원이 넘어야 할 산은 앞으로도 첩첩산중이다.

현재 노조는 딱 두가지를 요구하고 있다. 우선 회사측은 성실한 교섭에 임할 것. 요식행위가 아닌, 진정으로 노조를 대화파트너로 인정하고 교섭에 나서야 하고, 이같은 교섭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노조 집행부가 모두 정상적으로 교섭석상에 임할 수 있도록 구속자 석방 및 체포영장 발부 취하를 요구하고 있다.

공권력 투입 당시, 그리고 지난 10일 호텔 앞에서 경찰이 또다시 조합원들을 구타해 부상자가 모두 100여명이 훌쩍 넘어섰다. 그러나 이들은 그렇게 맞으면서도 한여름 더위에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거리로 나온다. 처음엔 노조가 뭔지도 잘 몰랐다는 롯데호텔 노조원들. 지금은 노조와 본인들의 투쟁이 너무도 당당하고 자랑스럽다는 이들. 자신들도 모르게 이제는 투사가 돼버렸다.

"나이 어리거나, 임신한 몸으로 투쟁에 나서고 있는 여성조합원들을 볼때 마음이 아파요. 그러나 우리를 이렇게 만든 것은 다름아닌 호텔과 정부입니다. 우리 스스로도 놀라고 있어요. 지금은 흩어져서는 안된다, 뭉쳐야 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회사의 협박전화에서 아랑곳없이 다시 명동으로 나올 수 있는 겁니다" 11년째 근무중인 이아무개(남·36·면세점 근무)씨는 현재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