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초유의 은행 총파업을 하루 만에 끝내고 노사정위원회가 12일 발표한 노. 정 합의문의 공식 제목은 '금융산업발전과 금융개혁 추진방향' 이다.

정부의 정책방향을 노조와 '합의' 했다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나온 제목이다.

이처럼 합의문을 조목조목 들여다보면 '숨겨진' 내용들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노.정간의 극적인 대타협을 감상한 '대가' 를 이제부터 국민이 치러야 한다는 점이 드러난다.

◇ 은행 부실 해결해 주려면 세금을 더 내야〓과거 은행들이 정부 지시로 러시아에 빌려줬던 약 13억달러(약 1조4천억원)와 수출보험공사가 보증한 4천4백억원을 재정에서 지원할 예정이다.

또 내년으로 예정됐던 예금보험공사의 은행차입금(4조원)과 한아름종금차입금(5조원)상환 등 9조원도 이번 합의로 연내 앞당겨 지급된다.

금융지주회사로 통합될 은행의 국제결제은행(BIS)기준 자기자본 비율 10%를 맞춰주기 위해서도 3조~4조원을 더 투입해야 한다.

공적자금이 바닥난 정부는 은행에 줄 돈을 마련하기 위해 공적자금을 추가 조성하거나 재정에서 끌어다줘야 한다. 정부가 최소 10조원, 최대 20조원의 공적자금을 추가 조성한다면 국민 1인당 25만원에서 50만원의 추가 부담이 생긴다. 이 돈을 전부 세금으로 내지는 않겠지만 공적자금이 축나는 만큼 국민 부담이 늘어나는 셈이다.

◇ 관치금융 근절〓노조 요구는 특별법 제정이었지만 국무총리 훈령 등으로 조율됐다. 특히 '정책 결정이나 집행을 문서 등에 따라 추진한다'는 대목이 주목거리다.

과거 정책은 담당 공무원의 전화. 구두지시로 주로 이뤄져 나중에 발뺌하면 '면피' 가 가능했다.

예컨대 1998년 신세기투신을 한국투자신탁에 인수시킬 때 당시 재정경제원은 손실 보전을 구두 약속했지만 끝내 이를 문서로 남기지 않았다. 결국한국투신은 엄청난 부실을 떠안고 쓰러졌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국민 세금만 5조원을 쏟아부었다.

문서화를 제대로만 지키면 섣불리 잘못된 정책을 밀어붙이는 관가의 관습은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민감한 사안에 대한 결정을 놓쳐 시장 부담을 키울 수도 있다.

정부 관계자는 "예컨대 우량 기업이 단지 악성 루머로 자금난에 몰려 은행에 급히 지원을 요청할 경우 이를 문서화하다 보면 루머를 인정하는 꼴이 돼 당장 해당 기업이 부도가 날 수도 있다" 고 말했다.

◇ 금융지주회사법 제정〓합의문에는 금융지주회사제도를 도입하되 ▶후순위채 매입▶인. 허가 우대 등 은행 지원장치를 마련한다고 돼 있다.

6월 말 결산 실적을 기준해 혼자 살기 어려운 은행과 공적자금이 직접 투입된 은행은 9월 말까지 정상화 계획을 내되 정부에서 독립된 8인의 경영평가위원회를 구성해 이를 평가한다. 생존 가능성이 있으면 독자생존을, 아니면 공적자금을 넣어 금융지주회사로 묶기로 했다.

이르면 10월 중 재무구조가 취약한 4~5개 은행 중 2~3개 은행이 금융지주회사로 묶이게 될 전망이다. 그만큼 은행 구조조정이 빨라진다는 뜻이다.


◇ "정부 주도 강제합병은 없다" 〓정부는 은행을 강제합병하지 않고 인원감축도 노사 협약을 존중키로 했다. 구조조정을 시장에 맡긴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번 파업에서 보듯 시장은 정부보다 더 냉정하다. 시장은 우량-비우량은행을 차별한다. 시장의 힘에 따라 비우량은행의 자금이탈이 빨라지면 정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어 대규모 인원조정을 앞당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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