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1970년 8월9일, 전태일은 일기를 쓴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전태일 평전>에서 이 글귀를 다시 찾아 읽으며 전태일 열사를 생각한다.

전태일 열사는 노동운동을 처음 시작할 때 높은 분들에게 현실을 알리면 달라질 것이라는 믿음, 법이 노동자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다. 그래서 ‘바보회’ 동료들과 평화시장 노동실태 설문지도 만들어서 돌리고 근로감독관도 찾아간다. 그러나 그 믿음이 좌절되고 이 현실을 숙고하면서 그는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현실은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했다는 인식을 갖게 된다. 한동안 모범기업체를 만들겠다는 구상도 해 보지만 그것도 방법이 아님을 알게 된다. 평화시장을 떠나 삼각산 엠마뉴엘 수도원 건축현장에서 일하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전태일 열사는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린다.

전태일 열사가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린 후 평화시장에 돌아와서 한 일을 보며, 전태일 열사의 결심은 ‘조직하고 행동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언론사들을 찾아다니며 노동자들의 현실을 전하고, 직접 조직한 삼동회를 중심으로 사업주들과 협상을 벌이고, 근로기준 개선을 위한 시위를 벌인다. 전태일 열사의 마지막 활동은 청원이나 모범업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을 모으고 현실을 바꾸기 위해 함께 투쟁하는 것, 자신의 삶을 그 길의 맨 앞에 세우는 것이었다. 법과 제도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자신의 몸을 불살라 더 많은 노동자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일갈은 그렇게 함께해 왔던, 앞으로 함께할 많은 노동자들을 향한 것이었다고 느낀다.

전태일 열사 50주기다. 그런데 전태일의 정신은 나에게, 우리에게 온전히 계승되고 있는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전태일은 노동자들의 비참함이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라고 외쳤는데, 저임금과 불안정노동으로 고통받는 비정규직 문제를 개인의 잘못으로 떠넘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커지고 있다.

“억울하면 시험 봐라, 억울하면 능력을 키워라”고 말하며 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를 승자의 전리품으로 만들고,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비정규직의 책임으로 떠넘긴다. 생활이 불가능한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쉽게 해고를 반복하고, 살아남기 위해 일터 괴롭힘을 견디고, 생존을 위해 강도 높은 노동을 하다 과로사하는 노동자들이 아직도 있다. 그런데 투쟁하는 비정규직들에게 “세상이 바뀌었으니 투쟁방식도 바꾸라”고 훈수를 두는 이들도 있다.

문재인 정부가 전태일 열사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한다고 한다. 전태일 열사가 외쳤던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는 요구를 5명 미만 사업장 노동자들이 아직도 외치는데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평화시장의 시다들이 폐병으로 스러졌듯이 지금도 하루 7명의 노동자들이 떨어져 죽고 끼어 죽는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하라는 요구에 대해 정부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이면 된다고 말한다. 전두환 신군부는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을 폐쇄하며 노조를 탄압했는데, 정부는 노조할 권리를 달라고 요구하는 비정규직의 목소리에는 귀를 막고, 파업할 권리를 제한하는 법을 만들겠다고 한다. 전태일 열사의 뜻을 계승하지 않으면서 전태일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전태일 정신을 박제하는 것이다.

여전히 나는 전태일 열사를 기억하고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자신의 삶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이들을 본다. 전태일 열사가 살아있다면 훈장을 수여하는 곳이 아니라 투쟁하는 이들 곁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가족은 일터에서 돌아오지 못했지만 다시는 같은 아픔을 만들지 않기 위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요구하며 싸우는 산재 피해 유가족들 곁에 있을 것이다.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싸우는 노동자들의 곁에 전태일이 있을 것이다. 모든 노동자의 노조할 권리를 위해 싸우는 노동자들, 그리고 시혜가 아니라 연대로 이 모든 투쟁에 함께하는 노동자들 곁에 있을 것이다. 사람을 수단으로 삼으며 무한착취에 이르고 있는 지금, 전태일은 이 구조를 온몸으로 부딪쳐 깨고자 하는 이들과 함께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work21@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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