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훈 여행작가

폭우가 쏟아졌던 미친 밀포드 사운드에서 하도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난동에 가깝에 흥분했던 탓인지 밀포드 사운드에서 테아나우로 돌아 나왔을 때는 몸도, 기분도 조금은 가라앉은 상태였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를 일. 하루를 추스르는 데 쓰기로 하고 다음날 방향을 남남동으로 잡았다. 뉴질랜드의 남서쪽 끝이랄 수 있는 밀포드 사운드 여행을 마쳤으니 이번에는 뉴질랜드의 남동쪽 끝을 지나 동쪽 해안을 타고 올라갈 생각이었다.

함께 움직이던 캠핑카 두 대 중 한 대는 최남단 도시인 블러프로 향했다. 그곳에 가서 세계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인증샷을 찍겠다는 굳은 각오로 다섯 시간을 오가는 운전을 감수하겠단다, 블러프는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맛난 자연산 굴 생산지라는 사실을 알려 줬지만, 인증샷에 정신이 팔려 그 좋은 미식의 기회를 놓쳤다나 어쨌다나.

나를 포함해 게으른 자들이 탄 나머지 한 대는 지름길을 이용해 북쪽으로 가는 해안도로를 타고 ‘뉴헤이븐’이라는 조그만 캠핑파크에 도착했다. 한적한 시골 바닷가 마을의 민박집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 주인장은 간 데 없고, 딱 중2병 또래로 보이는 주근깨 아들이 우리를 안내한다. 엄마 대신 자기가 손님을 맞는 게 스스로 대견하다는 듯 잔뜩 흥분한 얼굴로 자리를 알려 주더니, 보통은 한 차당 하나씩 주는 와이파이 쿠폰도 인심 좋게 1인당 하나씩 주는 것이 아주 크게 될 녀석이었다. 녀석을 따라 사무실을 빠져 나오려다 선반 위에 놓인 전단지를 무심결에 한 장 들고 나왔다. 생각 없이 주워든 이 전단지 한 장이 이번 여행에서 가장 쇼킹한 사건을 일으키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뉴질랜드산 소고기와 홍합으로 배를 잔뜩 불린 뒤, 내일의 여행 경로를 짜보려고 구글 지도를 켰다. 출발해서 가장 먼저 들를 곳은 너깃 포인트 등대. 그 뒤로 다시 북쪽을 향해 터널비치를 지나 남섬 제2의 도시인 더니든에 입성하는 것까지가 원래의 계획이었다. 뭔가 너무 달리기만 하고 심심하다고 생각했을 때 사무실에서 집어 온 전단지가 떠올랐다. 전단지를 펼쳐보고서는 내 눈을 의심했다. 바다사자를 볼 수 있다고? 그것도 무려 바닷가에서 놀고 있는 자연 그대로의 바다사자 떼를! 일행들 모두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다음날, 예정대로 너깃 포인트로 곧장 가지 않고, 바다사자가 산다는 캐니벌만으로 향했다.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비포장 도로를 타고 들어간다. 반대편에서 차라도 나오면 꼼짝 마라인지라 마음을 졸이며 30분 가까이 차를 몰았다. 마침내 구글 지도가 안내를 마치는 곳까지 왔는데, 왠 걸. 덤불 숲 사이로 자동차 두어 대가 세워져 있는 게 전부다. 바다사자를 구경할 수 있는 신기한 곳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적막했다. 뭐지? 이 동네 바다사자가 이렇게 인기가 없나? 흔한 물개도 아니고, 무려 바다사자라는데 이렇게 사람이 없다고? 모두 비슷한 생각이었다. 그냥 지역주민이 만든 초초 과장 광고성 삐라에 걸려든 셈 치고, 고즈넉한 바닷가 구경이나 재미나게 하고 가자는 심정이었다.

덤불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바닷가에 도착해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저쪽 모래사장 끄트머리에 뭔가가 점점이 꿈틀대는 게 보였다. 설마 저게 바다사자? 고개를 연신 갸우뚱거리며 점점이들에게 다가가는데, ‘크허어엉!’하는 커다란 동물의 울음소리가 모래바람을 타고 전해져 온다. 진짜, 레알, 정말로 바다사자가 있었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라 수십 마리가 떼로. 캠핑파크 전단지 내용은 뻥튀기 과자가 아니었다. 먼저 온 사람들이 바다사자를 에둘러가며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고, 대장 수컷으로 보이는 바다사자 한 마리가 고개를 높이 쳐들고 한껏 경계의 울음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무리를 지키는 대장 말고는 딱히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 녀석들은 없었다. 모래바닥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거리면서 낮잠을 자거나, 흘깃 몇 번 눈길을 주고는 이내 “인간 따위!”라는 듯 콧방귀를 끼는 정도가 인간을 대하는 시크한 바다사자들의 태도였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는 팻말 하나 이외에 바다사자와 사람을 가르는 어떤 경계도 없다는 게 너무나 낯설었다. 동물원 환경에 너무 익숙해진 탓인지 철망 하나 없이 바다사자를 대하려니 왠지 발가벗겨진 느낌이 들기도 한다. 늘 인간과 자연이라는 엄격한 이분법 속에서 살다가 이렇게 갑자기 하나가 돼 버리니 어색할 만도 하다. 하지만 낯섦도 잠시, 앞서 왔던 이들처럼 바다사자 무리를 빙 둘러가며 인증샷과 비디오 담기에 푹 빠져 버리고 만다. 가끔 경계를 넘어서서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바다사자들이 알아서 경계의 몸짓과 소리를 보낸다. “딱 여기까지다! 너무 질척대지 마라!”라는 분명한 메시지가 전해진다.

뉴질랜드 남섬 중에서도 동남쪽 해안은 캐니벌만의 바다사자처럼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야생동물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곳이다. 캐니벌만을 빠져 나온 나는 해안도로를 따라 북진하면서 새로운 야생의 친구들을 하나씩 만나려고 한다.

여행작가 (ecoc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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