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병길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

회색 벽을 사이에 두고 섬처럼 고립된 개인은 어느 문학 작품이나 신문 사회면에서 한 번쯤은 접해 봤을 법한 주제다. 도시화니, 기술의 발전이니, 신자유주의의 유행이니 하며 그 원인을 파헤쳐 보려는 시도도 끈덕지게 뒤따랐다. 사회·경제·문화적 요인으로 어쩔 수 없이 고립을 강요받은 사람도 있지만, 자발적으로 고립을 선택한 이도 많다. 코로나19 이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스스로가 원해도 타인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작게는 친목모임·경조사부터 크게는 국제교류까지, 만남은 만남을 넘어 일이 돼 버렸다. 코로나19는 모든 이들의 숨통을 단단하게 죄고 있다.

타인과의 만남이 이토록 그리울 줄은 몰랐다. 코로나19 이후 자주 나가던 취미모임 2개를 그만뒀다. 작년 할로윈 데이 때는 친구들과 방을 빌려 파티를 즐겼지만, 올해는 집이다. 일을 하면서 처음으로 화상회의와 재택근무를 경험했다. 북해도에 사는 친구에게 한 번 놀러 가겠다고 한 약속은 언제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뉴스에서 온라인 수업을 듣는 아이들을 본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고 뛰며 한참 사회성을 기를 나이에 집에만 박혀 있어야 한다니, 참으로 안쓰럽다.

노동자는 고립의 한복판에 서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사람들 간의 단절 사이사이를 택배·배달·돌봄·보건 등 사회 유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필수노동자가 잇고 있다. 이들은 디지털 플랫폼을 매개로 누가 나에게 일을 지시하고, 나와 같은 일을 하는 동료 노동자가 누군지도 모른 채 비즈니스의 톱니바퀴 일부분을 떠맡았다. 저임금, 과도한 업무, 각종 위험과 폭력에 시달리면서 말이다. 자본은 이 상황을 즐길지도 모르겠다. 뭉치면 시끄럽고 성가신 노동자를 플랫폼이라는 거창한 이름 아래 뿔뿔이 흩어 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게다가 방역을 빌미로 노동 3권을 제약할 위험이 커졌다. 무엇보다도 시민의 생명과 안전이 중요하다. 당연한 말이다. 그렇다고 방역과 결사·집회의 자유 사이 균형을 이루려는 노력을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 또한 그 균형을 누가, 어떤 목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판단하는지 경계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행정(권력) 편의적 결정이 남발될지도 모른다. 불행히도 이미 그런 징조가 보인다. 광장에는 다시 거대한 경찰버스가 등장했다. 곳곳에서 집회가 취소됐고, 법정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걱정이다. 노동자는 고립되면, 연대하지 않으면 힘을 쓸 수가 없다.

파편화한 노동자가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안 그래도 외곽으로 밀려났던 노동이다. 가장 취약한 비정규 노동자부터 점차 목소리를 잃어가고 있다. 노동자를 대변해 줄 이는 보이지 않는다. 국회는 국제기준인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비준도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차일피일 미루는 중이다. 안전한 일터를 만들기 위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도 애써 외면하고 있다. 많은 언론은 기업을 다루는 보도 양의 반의반도 노동에 할애하지 않는다. 그나마도 왜곡된 시선이 많다. 대변해 줄 이가 마땅찮으니 노동자는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 된다. 파편화한 노동자의 현실이 더 뼈아프게 다가온다.

날이 쌀쌀하다. 겨울의 초입이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특히 노동자에게 더 추울 것 같다. 그럼에도 희망을 이야기해야 한다. 가수 하림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속 수많은 이의 노래가 더 따뜻하게 들려온다. 얼마 전, 국회 국민동의청원 결과 시민 10만명의 동의를 얻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국회에 회부됐다. 그 과정에서 하림이 주도한 ‘#그쇳물쓰지마라 함께 노래하기 챌린지’가 큰 힘이 됐다. ‘그 쇳물 쓰지 마라’는 용광로에 빠져 숨진 한 노동자를 추모하며 쓰인 시다. 하림은 그 시를 노래로 만들었고, SNS에서 함께 불러주기를 요청하며 챌린지를 시작했다. 곧이어 많은 이가 공감을 표하고 함께 노래를 불렀다. 비록 온라인상이었지만, 음악을 통해 서로 이어질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사랑스러운 연대였다.

파편화한 노동자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더 뭉쳐야 한다. ‘#그쇳물쓰지마라 함께 노래하기 챌린지’는 좋은 본보기다. 이러한 음악이, 이와 비슷한 말과 몸짓이, 더 많은 연대가 필요하다. 많은 것이 낯설고 불안하다.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돼 그렇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불안은 익숙하던 것들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하이데거는 불안을 마주했을 때 인간 존재의 진면목을 성찰할 수 있다고 했다. 타인의 소중함과 노동의 고귀함에 감사하고, 따뜻한 말과 음악을 서로에게 건네는 겨울이 되면 좋겠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 (ilecdw@naver.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