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권 공인노무사(금속노조 법률원)

현행 교섭창구단일화 제도에서는 창구단일화 절차를 거쳐 확정된 교섭대표노조가 배타적 교섭권을 행사한다. 그렇다면 교섭대표노조가 되지 못한 ‘소수노조’는 헌법상 권리인 교섭권을 어떻게 행사할까. 걱정할 필요 없다. ‘공정대표의무’가 있으니.

공정대표의무에 따라 교섭대표노조와 사용자는 단체교섭 준비 단계부터 단체협약 체결과 이행까지 창구단일화 절차에 참여한 ‘소수노조’를 합리적 이유 없이 차별하지 못한다. 현행 교섭창구단일화 제도의 옹호 논리다.

그런데 교섭대표노조 등이 소수노조를 ‘공정’하게 대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내가 내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고 남이 그것을 행사하는 것을 애당초 ‘공정’하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절차적 공정대표의무에 관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소수노조가 조합원 의견을 수렴하여 교섭요구안을 마련했는데, 갑자기 교섭대표노조가 올해 교섭은 회사에 백지 위임하겠다고 선언해 버렸다. 이런 경우도 ‘공정’한가?

노동위원회와 법원에 따르면 교섭대표노조가 교섭을 포기하더라도 그 자체로 문제될 것은 전혀 없다. 실제로 충남지방노동위원회는 해당 사례의 소수노조가 제기한 공정대표의무 위반 시정신청 사건을 각하했다. 체결한 단체협약에 (실체적) 차별 내용이 없어서 절차적 공정대표의무 위반 시정을 구할 실익이 없다는 이유다. 실체적 차별이 없는 경우 절차적 공정대표의무 위반 여부는 검토 대상에 오르지도 못한다는 말이다.

최근 대법원은 절차적 공정대표의무 위반 내용을 매우 협소하게 해석하면서 교섭대표노조가 소수노조(조합원)에게 단체협약 잠정합의안 찬반투표 등 절차참여권을 보장하지 않은 것을 공정대표의무 위반으로 판단한 하급심 판결을 파기했다. ‘단체교섭 전 과정을 종합해 기본적이고 중요한 사항에 관한 정보제공과 의견수렴 절차를 누락하는 등 교섭대표노조의 재량권 일탈·남용’이 분명히 드러나는 경우에 절차적 공정대표의무 위반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섭대표노조가 단체교섭과 협약 체결과정에서 소수노조에게 형식적으로 공문을 발송하고 의견제출 기회만 부여하면 십중팔구 절차적 공정대표의무를 이행한 것으로 판단하겠다는 것처럼 들린다.

이번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 절차참여권 배제를 공정대표의무 위반 내지 불법행위로 보고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 하급심 판결·노동위 판정이 이어졌고, 이에 근거해 소수노조가 절차참여권을 보장받거나 더 나아가 교섭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교섭권 박탈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하는 현장들이 생겨나던 터였다. 그만큼 대법원 판결에 대한 현장의 혼란과 분노가 크다.

사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해당 판사들의 내심과는 별개로 민주노조 운동에는 다시 한번 배타적 교섭창구단일화 제도 폐기의 중요성을 확인시켜 준 계기였다. 지금같은 제도 하에서 절차적 공정대표의무를 아무리 적극적으로 해석한다고 한들, 교섭의제·교섭전술·잠정합의안·단체협약의 내용과 타결 여부의 결정은 모두 교섭대표노조의 전속적 권리일 뿐이다. 결국 절차적 공정대표의무란 ‘소수노조에 알려만 줘. 그러면 교섭대표노조 멋대로 해도 아무 상관없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소수노조가 교섭 과정과 결과에 대한 아무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는데 그게 바로 교섭권의 본질적 제한이 아니면 무엇인가.

대법원이 교섭창구단일화 제도의 위헌성을 가려온 얄팍한 가림막조차 거추장스럽다고 내던져 버린 것처럼 위선보다 위악이 나을 때가 있다. 그러나 이런 위악이 ‘강자의 의상(衣裳)’일지 ‘약자의 의상’일지는 결국 운동의 의지와 역량에 의해 판가름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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