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센 자본가 이건희 회장(이하 직함 생략)이 죽었다. 그의 부고가 발표되자 언론들은 떠들썩하게 무가치한 뉴스들을 쏟아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나 “천재 한 사람이 10만명을 먹여 살린다”와 같은 어록, ‘혁신 DNA’나 ‘여성인재 양성’을 운운하는 찬양과 ‘가짜 유서’를 둘러싼 소란, 그리고 도합 400억원에 이른다는 스포츠카 취향까지. 역대급 호들갑에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국내 대표 주간지 <시사인>의 최근호 편집국장의 편지는 우리가 “억지로라도 그를 애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욕설과 찬양보다는 애도하는 쪽이 산 자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란다. 이해해 보려 노력했다.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든, 혹은 사회에 온갖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든 우울증이나 저주하기에 사로잡히기보다는 떠나보내는 편이 현명한 일일 것이다.

한데 <시사인>의 요청엔 몇 가지 의아한 구석이 있다. 이건희의 부정적인 평가를 공정하게 다루는 것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놀랍게도 탈법적이고 잔혹한 노동탄압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다. 아마도 “‘이건희의 과감한 장기투자’와 ‘삼성그룹이 받아 온 격렬한 비난’의 원인이 동일하다”는 주장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일 게다. “과감한 장기투자”와는 무관한, 초과착취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건희는 아버지 이병철이 했던 것처럼 노조설립을 저지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해 왔다. 1987~88년 삼성중공업 노동자들은 회사의 유령 노조 설립으로 노조 만들기에 번번이 실패했다. 이런 역사는 삼성전자와 에버랜드·SDI, 그리고 최근 삼성전자서비스에 이르기까지 그치지 않고 반복했다.

인천 남동공단의 한 자동차 부품공장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공장 앞에 아우디 승용차를 세워 놓고 낮잠을 자던 회장 아들은 아침마다 200명의 공장 노동자들을 모아 조회를 열었다. 어느날 그는 불량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노동자들에게 커다란 해머로 때려 부수라고 시켰다. 이건희의 프랑크푸르트 일화를 따라하는 퍼포먼스였다. 그는 어떻게 하면 잔업을 뺄까 궁리하는 조직문화를 극복하고 자신의 일처럼 성실하게 일해야 삼성처럼 세계적 기업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강제 야근·특근과 무료노동·최저임금으로 점철된 공장을 일류기업으로 만든다? 어찌됐든 노동자들은 하릴없이 돌아가며 해머를 휘둘러야 했다.

삼성이 하면 대한민국 모든 기업의 규범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기업가 이건희’는 삼성만이 아니라 전국 모든 노동자에게 하나의 ‘효과’다. 이쯤 되면 한국 사회의 평범한 노동자들이 이건희를 떠나보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애도’의 의미를 주창하는 일에 매달리다 보니 스스로 ‘이건희 신화’가 만든 유령에 사로잡힌 게 아닌지 묻고 싶다.

더구나 <시사인>은 비판·찬사의 대립을 무리하게 대당시키기 위해 ‘비판’ 대신 ‘욕’을 집어넣고 있다. 빛과 그늘을 공정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 그랬겠지만, 안 그래도 거의 실리지 않는 건강한 비판들마저 도매급으로 폐기 처분했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제대로 된 비판이 없는 시대야말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바가 아닐까? 삼성이 저지른 산업재해와 불법적인 경영승계, 무수한 죽음과 초법 행위가 반복했던 노조탄압의 역사가 단절되지 않은 상황에서 ‘비판’을 ‘욕’으로 치환해도 괜찮을까?

이건희 영결식이 쟁쟁한 권력자들의 참석으로 끝난 지 사흘 뒤인 지난달 31일은 2013년 이건희의 노조탄압에 항의해 목숨을 끊은 서른세 살의 삼성서비스 수리기사 최종범 열사의 기일이었다. 노조 간부였던 최종범은 고용노동부가 삼성전자서비스의 불법파견을 은폐한 뒤 사측의 탄압에 시달리다가 ‘전태일 열사’를 언급한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얼마 전 이 죽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에 대한 판결이 있었다. 이달 2일 서울고법 형사3부는 삼성전자서비스의 수시근로감독 발표를 앞두고 지방노동관서가 불법파견을 인정하는 취지로 결론을 내려 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사측에 유리한 결론을 내도록 개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불법파견을 은폐한 혐의로 기소됐던 정현옥 전 노동부 차관과 권혁태 전 서울지방노동청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개입은 했지만 무죄라는 터무니없는 판결이다. 삼성전자서비스 불법파견이 면죄부를 받은 뒤 노동자들은 몇 년간 지독한 노조 괴롭히기에 시달려야 했고, 한 노동자는 목숨을 끊었다.

우리는 여전히 ‘이건희 효과’로 고통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 죽은 이건희를 마땅히 떠나보내야 함에도 노동계가 비판을 이어가는 것은 집단적인 우울증의 지속도, 이건희라는 타자의 유령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도 아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 지극히 구체적인 억압기제에 속박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비판자들이 아니라, 떠나보낼 상태가 되지 못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언론 자신이다. 우리가 떠나보내야 하는 것은 자본가 이건희가 노동자들을 향해 저지른 짓에 대한 망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망각을 종용하는 사회적 행위 자체다. 우리가 여전히 이건희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름 없는 노동자들의 삶이 아직 그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노동 연구자가 말했듯, “애도하지 마라, 조직하라.” 이건희를 억지로라도 애도하려면.

플랫폼C 활동가 (myungkyo.h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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