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이미지투데이

코로나19로 시행된 사회적 거리 두기는 공연·예술인들의 무대도 앗아갔다. ‘줌바댄스발 코로나19’ 같은 키워드는 문화·예술 수업도 위축시켰다. 코로나19 이후 공연·예술인들의 삶의 풍경은 어땠을까. 한파를 겪은 이들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문화·예술 정책은 무엇일까. 1일 <매일노동뉴스>가 문화기획자 이수현(가명)씨를 통해 문화·예술인들이 코로나19 시기를 살아가는 법을 엿봤다.

언제 끝날지 몰랐던 대기상태
“실업급여·휴업급여도 못 받아”


이수현(34)씨의 대학 전공은 심리상담이었다. 남미 여행 경험이 문화기획자로 진로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 여행한 지역에 다양한 인종이 어울려 살거나 다양한 문화가 오랫동안 쌓여 온 모습이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이씨는 외국인임에도 전혀 위화감 없이 다양함의 일부로 자신을 받아들여 주는 사회 분위기를 느꼈다. 그게 문화의 힘이라 생각했다. 개인 심리상담을 하는 것보다, 사회나 문화가 바뀌었을 때 사람들이 더 행복해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돌아온 이씨는 문화기획사 인턴사원을 거쳐 소규모 무용단 기획자로 일을 시작했다. 지역문화재단 같은 단체들의 사업에 지원해 공연 작품을 올리고, 1년 또는 수개월 단위로 학교를 비롯한 기관·단체들과 계약을 맺고 무용 수업도 했다. 무용단이 임대한 연습실에서 일반 성인을 대상으로 무용 수업을 하기도 했다. 이씨가 기획하고 무용단이 수업을 하는 식이었다. 연구를 비롯한 문화·예술과 관련해 여러 기관의 다양한 업무를 도와주기도 했다. 계약할 때마다 변수는 많았지만 생계에 큰 어려움 없이 보람을 느끼며 일을 이어 나갔다.

“공연을 하든 수업을 하든 저의 초점은 ‘만나는 사람들’이었어요. 그 사람들이 내 삶에서 이걸(무용을) 만나서 ‘더 자유로워졌다’거나 ‘더 편안해졌다’ ‘좋은 변화를 느꼈다’고 이야기할 때 뿌듯했어요.”

하지만 올해 1월 국내에 들어온 코로나19는 이씨의 삶을 할퀴었다. 2~4월에 계획돼 있던 공연이 모두 연기되거나 취소됐다. 연기된 공연은 결국 모두 취소됐다. 공공기관·대안학교·장애인단체를 비롯한 각종 기관·단체에서의 수업도 3월부터 시작하기로 했지만 모두 연기됐다. 3~4월께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화됐을 때는 개인 수업조차 대폭 축소됐다.

자연스럽게 생계에 빨간불이 켜졌다. 수입은 절반 이상 줄었다. 긴급고용안정지원금이나 서울시 소상공인 생존자금이 보탬은 됐지만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닌 탓에 4대 보험에 가입되지 않아 이씨는 실업급여도 받지 못했다. 강사로서도 시간당 강의료를 받는 구조로 일하고 있었기에 휴업수당 같은 것은 받을 수 없었다.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기도 힘들었다. 코로나19 사태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끝나면 하려던 일에 투입될 수 있도록 ‘대기’하는 상태가 계속됐다. 한 단체와 계약을 맺고 문화·예술 관련 연구를 하고 받은 사례비가 그나마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 됐다. 이렇게나마 벌어들인 수익은 모두 연습실 월세와 식비·교통비를 비롯한 기본적인 생계비용으로 나갔다. 공연도, 수업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이니 월세를 깎아달라고 임대인에게 청해 보기도 했다. 임대인은 월세 일부를 인하해 줬지만 딱 한 달이었다. 임대인도 월세가 생활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고령자여서 더 이상은 힘들다고 했다.

4~5월께에는 각종 문화재단의 문화·예술사업에 지원서를 ‘써 대기’ 시작했다. 결과는 번번이 탈락이었다. 이씨 자신만이 아니라 함께 무용하는 이들, 적게는 3~4명, 많게는 15명의 생계까지 연결된 일이어서 마음이 참담했다. 선정된 팀들은 업계에서 유명하다고 소문난 팀들이었다. ‘저렇게 업계에서 영향력 있고 유명한 사람들도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며 위기 속에 있구나’라는 생각에 지금의 상황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동시에 ‘이런 상황에서 우수한 팀에게만 지원하는 것은 안 맞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러다 딱 한 곳, 이씨의 지원서를 선정한 곳이 있었다. 영등포문화재단이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지원금을 기대했는데, 지원금이 당초 공고한 금액보다 5배가량 적었다. 이유를 알아봤더니 지원한 모든 팀을 선정해 지원금 총액을 나눠준 것이었다. 기대했던 돈은 확 줄었지만 이씨는 오히려 감사하다 느꼈다. 이씨는 “돈의 크기와는 별개로 ‘코로나19로 힘들어하는 지역 문화·예술인 모두에게 지원하겠다’는 공공기관의 제스처가 다른 기관·재단과 비교했을 때 피부로 와 닿았다”고 말했다.

예술인 처지 이해한 민간단체
문부터 걸어 잠근 공공기관 


희망은 공공기관보다 오히려 민간기관·단체들에서 발견하기도 했다. 코로나19가 장기화하면서 민간기관에서의 수업이 일부 재개되면서다. 이씨의 무용단이 계약을 맺었던 A대안학교의 경우 코로나19 사태 이후 학부모와 학생·학교측이 어디까지 수업이 가능한지 강사들과 계속 대화했다. 때문에 A학교에서는 온라인을 통해 수업하거나, 소규모로 오프라인 수업을 하는 등의 방식으로 수업을 다른 기관보다 일찍 재개할 수 있었다. 이씨는 이런 대화 과정들이 “엄청 소중하다” 느꼈다.

민간 장애교육기관인 B단체에서는 감염에 취약하고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장애인 특성상 수업을 재개할 수 없었지만 강사들에게 사례비를 지급했다. 소정이라고는 하지만 당시 이씨에겐 큰 돈이었다. 이씨는 지금 같은 재난 시기에 ‘당신이 처한 상황을 우리도 알고 있다’는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다.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개인 수업에서도 수강생들과 함께 “뭘 할 수 있을까” “이렇게 해 보는 건 어떨까”를 이야기하면서 수업을 소규모로나마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대화의) 경험들을 통해 (미래 예술활동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됐어요.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고,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과 공동체 안에서는 가능한 것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씨는 “앞으로도 대화가 가능한 공동체를 더 많이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반면 공공기관의 닫힌 문은 조금 더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다. 이씨는 공공기관이 시민·예술가들과 대화하거나 다양한 대안을 고민하지 않고, 행정적으로 가장 손쉬운 방법인 ‘폐쇄’를 일방적으로 결정했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가끔 연습실보다 더 좁은 식당에서 많은 사람들이 빽빽하게 앉아서 마스크를 벗고 한두 시간 동안 침을 튀기면서 밥을 먹는 모습을 볼 때면 공공기관의 대처가 비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더 커졌다. 이씨는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것도 먹는 것만큼이나 시민들에게 중요한 행위인데, 우리 사회가 문화·예술을 즐기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어서 가장 먼저 축소되는 것 같다”며 “좋은 집에 사는 사람들은 상관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많은 시민들을 사회적으로 고립하게 만드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씨는 “공공기관은 시민들에게 무료로, 또는 저렴하게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만큼 그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며 “(일방적으로 문을 닫는 것은) 무책임하고 오히려 계층 간 문화 격차를 커지게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우려했다. 이씨가 진행하던 공공기관 수업은 최근에서야 재개했다.

“다양한 예술인 처지에 맞게 지원해야”

이씨는 정부 정책자들이 코로나19 시기에 예술가들이 처한 다양하고 세부적인 상황을 알고 그에 맞는 지원을 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이씨는 “신문을 봤더니 독일 베를린의 경우 프리랜서와 자영업자 신분으로 일하는 문화·예술인들이 베를린에서 세금을 내고 경제활동을 하고 있으면 외국인을 차별하지 않고 코로나19 지원금을 지급한다고 한다”며 “수급 대상자에 포함된 한 한국인의 경우 신청한 지 3일 만에 한화로 600만원 정도 되는 돈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고 소개했다. 예술인 고용보험 필요성도 절감했다고 덧붙였다.

이씨는 정부가 다음에 팬데믹이 왔을 때도 이렇게 문을 ‘닫는’ 선택만 할 것이냐고 반문했다. 이씨는 “장애인 복지관 사람들도 그렇고, 계속 누군가와 연결되고 만나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음에도 또 다시 문을 닫는 선택만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있다”며 “정부가 여기에 대한 대책도 더 마련해야 한다고 보고, 그 대책 마련은 제가 A대안학교에서 경험했듯 소통 구조가 잘 될 때 (구성원들이) 합의하면서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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