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50년 전 전태일 열사는 자신의 몸과 함께 법전을 불태웠다. 그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근로기준법의 무력함을 그렇게 폭로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근로기준법 화형식은 당시 노동자들에게 노동 현장에도 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줬는데, 혹자는 이를 “근로기준법이란 보물지도”를 노동자들이 발견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노동자에게 법은 항상 이중적이다. 노동운동은 한편에서는 법의 공정한 적용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법의 부당함 탓에 어려움에 빠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공정한 법 적용을 요구하는 대표적 사례는 부당노동행위 처벌이다. 법의 허용 범위를 벗어난 파업에 대해서는 쇠몽둥이 역할을 하는 법은 역으로 사용자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솜방망이로 다룰 뿐이다. 5명 미만 사업장에서 노동법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 것도 그런 사례다. 노동자의 보편적 권리가 사업장의 규모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공정한 법 적용이라 보기 어렵다.

부당한 법 적용이 문제가 되는 대표적 사례는 파업 범위 제한이다. 기업 안에서 경영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경영과 관계하는 요구를 하면 파업은 불법이 된다. 경영자가 노동조건과 노동자의 처분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과 비교해 보면 법의 잣대 자체가 지극히 편파적이다.

법은 태생적으로 힘 있는 사람에게 유리하다. 법의 역사적 형성 과정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법은 폭력을 보유한 개인이나 집단의 동맹을 만들기 위한 규범으로부터 만들어졌다. 무력을 보유한 자들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면 상호 피해가 막심하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무력행사가 계속되는 경우 사회의 존속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법은 개인 또는 집단이 보유한 폭력을 상호 규제해 이득을 얻으려는 지배계급의 합의에 기반한다. 예로, 현대 이전에는 힘이 있는 집단이 외적의 침입을 막고, 소작농에 대한 수탈과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군신 관계와 세금을 정해 놓는 법을 만들었다. 당시 법은 외적과 농민을 상대하기 위해 지배계급 사이의 폭력을 규제하고 지대를 분배하는 동맹을 만드는 규범이었던 셈이다.

현대(근대) 법은 지배자들의 동맹이란 속성을 철저히 감춘다. 상업화·산업화로 성장한 17~18세기 서유럽 신흥세력과 산업화 이후 대규모로 형성된 노동자계급이 조직된 힘을 가지면서, 보편적인 형태로 법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대는 평등한 자유를 원칙으로 삼는 자유주의를 사회 규범의 원리로 삼았다. 법은 시민 모두에게 공평해야 한다는 원칙도 성립됐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공명정대한 법 제정과 집행을 위해 입법부·사법부·행정부의 권한과 구성, 상호 견제에 관한 여러 제도가 발전했다. 현대의 법치는 여러 제도를 통해 사람이나 집단에 종속되지 않는 법, 즉 법의 비인격성을 지향한다.

물론 그렇다고 법의 근본 속성이 바뀐 것은 아니다. 특히 경제에서 이런 속성은 불가침의 재산권과 생산수단 소유자가 생산물을 소유한다는 법칙으로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다. 다들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듯 시장에서 기업과 노동자는 절대 평등할 수 없다. 앞서 본 노동법의 잣대와 적용만 봐도 알 수 있다. 더욱이 노동자는 생산현장에서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절대 누리지 못한다. 명령과 규율이 기업 조직의 요체다. 노동자는 생산현장에서는 노동하는 노예로 존재하며, 오직 임금으로만 보상을 받는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법은 현대 사회의 진보였지만, 그 진보는 계급지배라는 속성 탓에 평등한 자유를 향해 제대로 나아가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경제에 뿌리를 박고 있는 근본적 불평등을 유지하는 것이 법의 목표라며 그 이중성을 폭로한 바 있다. 참고로, 마르크스가 현대적 법의 진보성을 모두 부정했다고 오해하지는 말자. 인(人)치가 아니라 법치가 당연히 역사의 진보다. 마르크스는 “자유로운 개인의 연합”을 대안으로 이야기한 바 있는데, 이 연합은 개인의 평등한 자유를 확대하는 비인격적 통치를 의미했다. 자유주의적 법치의 ‘결함’을 해결하는 게 마르크스의 지향이었다고 볼 수 있다. 법치를 당(黨)치 또는 인치로 바꾼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역사적 퇴보는 왜 자유주의적 법치가 그래도 더 나은지 보여주는 반증이라 하겠다.

한편, 최근에는 법과 관련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논쟁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검찰총장이 자신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며 수사 지휘를 남발하고, 심지어 현 정부에 불리한 수사를 한 검찰들을 마구잡이로 징계 또는 감찰하고 있어서다.

하지만 추 장관의 이런 행동은 법치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첫째, 검찰에 대한 ‘내로남불’ 태도 때문이다. 집권 초기 적폐청산 수사를 할 때에는 검찰에 막강한 권한을 실어 주다가 자신에게 수사가 향하자 온갖 핑계를 만들어 검찰을 통제한다. 법 적용을 정치적 진영에 따라 달리하는 것은 법치의 근간인 비인격성을 허무는 것이다. 둘째, 검찰개혁이 아니라 검찰 제도 자체를 허물고 있어서다. 검찰 제도는 사법부의 독립을 강화하기 위해, 수사와 소추를 법원에서 분리해 만든 것이다. 행정부에 있지만, 사법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준사법기관이라고도 부른다. 정부조직법을 들고 와서 검찰에게 갑자기 행정부의 하급기관이 되라고 하는 것은 사법제도를 타락시키는 것이다.

현 집권세력의 법에 대한 태도는 상당히 위험하다. 적폐청산의 이름으로 정치를 사법화하더니, 이제 사법을 정치화해서 자기 수중에 두려고 하고 있다. 만약 이런 식의 정치와 사법 관계가 이어지면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적폐청산 숙청과 검찰의 줄서기가 반복될 것이다. 공수처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1970년 11월 전태일은 자신을 던져 법의 무력함을 폭로했다. 그가 법의 계급성까지 알았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의 희생 덕분에 근로기준법은 조금은 법다운 효능을 갖출 수 있었다. 2020년 가을의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법을 자신의 수중에 두기 위해 온몸을 던지고 있다. 그들의 반민주적 폭거 탓에 시민들은 아예 법 없는 세상으로 나가떨어질 위험에 처했다. 2020년의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은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철저한 규탄이어야 한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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