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효원 아시아노사관계(AIR) 컨설턴트

택배노동자 과로사를 막기 위한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근로기준법 적용이 해법이 아니겠냐고 말했다가 낭패를 봤다. 택배노동자들은 근기법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더욱 씁쓸했던 것은 근기법 적용을 받는 ‘근로자’ 범위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의 적용을 받는 ‘근로자’ 범위보다 훨씬 좁다는 이야기였다. 다시 말해 근기법이 말하는 근로자와 노조법이 말하는 근로자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노동법에 나오는 ‘근로자’라는 말에는 두 가지가 겹쳐 있다. 피고용인(employee)과 노동자(worker)다. 피고용인이란 “삯을 주고 사람을 부리는 사람”인 고용인(雇用人)에게 종속돼 일하는 사람을 말한다. 대한민국 판사들은 근기법을 해석할 때 고용인과 피고용인 사이의 분명한 관계를 요구한다. 그 결과 비정규직이라도 정상적인 고용관계(regular employment relationship)하에 있는 종업원(employee)만 근기법을 적용받는다.

민주노총이 입법을 요구하는 전태일 3법에는 이 문제가 빠져 있다. 노조법 2조가 규정하는 ‘근로자’의 기준을 넓히자는 주장은 있으나, 근기법 2조가 규정하는 ‘근로자’의 기준을 넓히자는 주장은 없다. 늘고 있는 특수고용 노동자나 플랫폼 경제 종사자에게 노조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면, 동시에 근기법 1조(목적)에 나와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에 기여하는 일원으로서 “기본적 생활에 대해 보장과 향상”을 누릴 권리도 보장해야 하는 것 아닐까.

여기서 근로자가 누구인지를 둘러싸고 혼란에 빠진다. 노동법의 근로자는 두 가지 다른 실체, 즉 종업원과 노동자를 한꺼번에 담아내려 하기 때문이다. 국가법령정보센터 영문판에서 근로기준법을 검색하면 ‘근로자’는 employee로 번역된다. 반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에선 ‘근로자’가 worker로 번역된다. 대한민국 노동법에서는 근로자가 employee와 worker로 갈리는 것이다. 근기법은 고용계약을 맺어 사용자와의 고용관계가 명확한 종업원을 위한 법이고, 노조법은 고용관계가 분명하지 않더라도 노동력(labor power)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노동자를 위한 법으로 나눠진다. 노동법에서 일어나고 있는 피고용인(종업원)과 노동자의 분열 현상을 한국말인 ‘근로자’로는 이해할 수 없고 영어인 employee와 worker를 써야 이해되는 현실은 씁쓸하기 짝이 없다.

근로기준에 대한 공식 영어 번역은 Labor standards Act이지만, 영어본 1조에서 이 법이 정해야 하는 것은 ‘노동기준(labor standards)’이 아니라 ‘고용에 관한 약관과 조건(the terms and conditions of employment)’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근로조건을 표현하는 영어 표현인 working conditions(일하는 조건)보다 훨씬 협소한 개념이다.

근기법과 노조법에서 말하는 ‘근로자’ 개념의 분열만큼 심각한 문제는 근기법이 말하는 ‘근로’의 개념도 분열돼 혼란스럽다는 점이다. “근로자란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labor)를 제공하는 사람을 말한다”는 근기법 2조1항의 근로와 “근로(work)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말한다”는 동법 2조3항의 근로가 영어본에서 달리 표현되고 있다. 또한 근기법 2조5항에서 말하는 ‘임금’은 “사용자가 근로의 대가로 근로자에게 지급하는 모든 금품”을 말하는데, 여기서 근로는 work를 쓰고 있다. 근기법은 임금을 ‘노동(labor)의 대가’가 아니라 ‘일(work)의 대가’로 보는데, 이는 종래의 국제규범과 어긋나지 않는다.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100호가 말하는 ‘동등 보수(equal remuneration)’의 전제조건은 ‘동등 가치의 일(work of equal value)’이기 때문이다.

50년 전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쳤다. 그때 전태일은 일하는 사람(working people)이라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근기법을 원했을까, 아니면 비정규직이라 하더라도 분명하고 정상적인 고용관계하에 있는 종업원의 자격을 갖춘 이에게만 적용되는 근기법을 원했을까. 전태일이 원했던 근기법은 일의 원천이 되는 노동(labor)을 보호하려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노동의 결과인 일(work)을 보호하려는 것이었을까. 근기법이 ‘노동기준’을 규율하는 법이 아니라 ‘고용에 관한 약관과 조건’을 규율하는 법으로 전락한 현실을 보면서 1970년 11월13일 이후 오십 년이 흐른 지금, 남은 것은 전태일 이름 석자요 오간데 없이 사라진 것은 그의 꿈인 모든 노동자를 위한 근로기준법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백여년 전 자본주의 공장제가 출현하고 화석 에너지에 기반한 1차 산업혁명과 2차 산업혁명을 겪으면서 인간은 기계와 함께 일을 해 왔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노동은 일이고 일은 인간의 노동처럼 보였다. 하지만 재생에너지에 기반한 3차 산업 혁명으로 이행하는 오늘날 노동과 일의 분열(division between labor and work)은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인간이 기계와 같이 하던 일을 기계가 혼자 하는 시대가 오면 인간의 노동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일이 없어지거나(without work), 일이 줄어드는(with less work) 세상에서 인간의 노동은 어떤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새롭게 등장하는 일의 세계(the world of work)에는 근기법을 적용할 수 있을까 없을까.

전태일이 죽은 1970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79달러였다. 노동자 대투쟁이 있던 1987년에는 13배 늘어 3천555달러였다. ‘노동존중’을 약속한 정권이 들어선 2018년에는 120배 늘어 3만3천40달러였다. 대한민국의 ‘생산력’이 120배 느는 동안 노동조건을 둘러싼 ‘생산관계’는 얼마나 나아졌을까. 시대에 발맞춰 진화하지 못하고 화석처럼 굳어버린 근로기준법을 보면서 ‘생산의 사회적 관계’를 둘러싼 우리의 관심과 상상력은 스물두살 대구 촌놈 전태일보다 훨씬 못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시아노사관계(AIR) 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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