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훈 여행작가

사람마다 여행을 하는 모양새에는 큰 차이가 있다. 비행기표만 끊고 떠난 뒤 닥치는 대로 문제를 해결하는 ‘오늘만 사는’ 스타일도 있지만, 나처럼 꼼꼼하게 일정과 경비를 짜는 유형도 있다. 내 경우는 어쩌면 여행만큼이나 여행 계획 짜는 걸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프로 여행자보다는 프로 여행 설계자가 더 어울린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렇게 촘촘히 계획을 짜고 떠난다고 해도 막상 여행이 시작되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가 태반이다. 그런데 그런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생기면 사실 더 신이 난다. 틀어진 계획에 따라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맛을 즐기는 타입이랄까? 구글 스트리트뷰가 생긴 뒤로는 계획 설계자 증후군이 더 심해졌다.

뉴질랜드에서 택한 캠핑카 여행은 여행 중에서도 가장 변수가 많은 여행에 속한다. 차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때로는 길을 잃기도 하고, 갑자기 졸리거나 배가 고파져도 세웠던 계획을 바꾸게 되는 것이 캠핑카 여행이다. 하물며 무심코 눈에 들어온 멋진 풍경을 만나게 된다면 더 말할 것도 없이 무계획의 계획 상태로 직진하게 된다. 전혀 계획에 없던 보석 같은 장소와 마치 전생의 인연처럼 만나게 되는 이 순간이 캠핑카 여행의 결정적 순간이다.

남섬의 서쪽 해안을 죽 돌아보고 트럭 주차장 겸 카페에서 하룻밤 노숙을 한 뒤, 해 뜨는 시간에 맞춰 서둘러 섬의 동서를 가로지른 ‘아서스 패스’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비바람과 안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통에 정상을 지나 반대편에 다다랐을 때는 꽤나 피곤해져 버렸다. 나른한 오후가 시작될 즈음, 식상한 표현이지만 눈앞에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 나타났다. 마른 풀로 덮인 높은 산 하나를 병풍처럼 세워 둔 채, 반짝거리고 있는 호수의 이름은 ‘레이크 피어슨’. 이름난 관광지가 아니어서 동네 사람들 몇몇이 낚시를 하거나, 수영을 즐기는 게 전부인 한가로운 호수였다. 차를 세우고 곧바로 캠핑 의자를 꺼내고는 몸을 반쯤 누인다. 호수 한쪽 끝에서 뉴질랜드 ‘초딩’들이 삐악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카약을 배우기 위해 근처 학교에서 체험학습이라도 나온 모양이었다. 그 소리가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다. 이내 나른함이 밀려들어 온다.

한잠 시원하게 때리고 다시 길에 올랐다. 여기서 두 시간 정도 더 달리면 나올 캠핑 파크가 오늘의 최종 목적지다. 구불거림 하나 없는 지루한 길을 그렇게 한참 달리다 보니, 앞쪽 언덕 꼭대기에 울퉁불퉁하게 서 있는 커다란 바위들이 눈에 들어온다. 구글 지도에 나오는 이름은 ‘캐슬힐’. 이름처럼 성으로 보이지는 않고 돌덩어리 만물상들이 무심하게 도로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한참 꽂혀서 반복 재생 중이던 에드 시런의 노래 <Castle on the hill>이 떠오른다.

“I’m on my way, driving at 90 down these old country lanes. Singing to Tiny Dancer, And I miss the way you make me feel (후략)”

노랫말처럼 고향으로 가는 도로는 아니지만 햇빛 찬란한 오후의 탁 트인 시골길을 달리며 옛노래를 흥얼거리는 감성만은 가사 그대로다. 우연하게 끌려 들른 곳이었지만, 캐슬힐은 ‘찐’이었다. 멀리서 보는 모습은 맛보기에 불과했다. 주차장에서 언덕 아래까지 이어진 흙길도 멋짐 그 자체다. 길옆 풀밭에서 말 그대로 ‘말근육’ 탱탱한 말 한 마리가 지나는 사람들 쪽으로 머리를 내밀고 풀을 뜯고 있는 모습까지 어쩜 그렇게 멋진지. 하지만 진짜 ‘찐’은 언덕 뒤편까지 가고 나서야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언덕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넘어가면 나타나는 언덕 뒤 세상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돌들의 세상이었다. 언덕 위에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던 녀석들은 그러니까 보초이자, 인간의 세상과 돌들의 세상을 가르는 경계선이었던 셈이다. 언덕 뒤 넓은 평원으로는 온갖 모양으로 쌓이고 깎이고 뒤틀린 바위들이 한동안 이어진다. 돌들의 세상에 들어선 인간은 자신의 세상에서 벗어난 탓인지 묘하게도 홀가분함을 느낀다. 어린애라도 된 모양으로 돌들 사이를 뛰어다니기도 하고, 푹 패인 돌 속에 쏙 들어가 얼굴만 내민 채 인증샷 놀이에 빠지기도 한다. 마음에 딱 드는 너럭바위를 골라 찬란한 햇빛 아래 큰 대자로 그대로 뻗으면 그만인 비타민D 합성 놀이도 왠지 신이 난다. 돌들의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알 리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닐까? 언덕 꼭대기에 올라 돌 보초들 곁에 서서 같은 눈높이로 인간들의 세상을 바라본다. 잠깐 걸어온 길 같은데 주차장부터 언덕까지의 거리가 아득해 보인다. 세상으로부터 제법 떨어져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저녁 지어 먹을 생각에 해가 저물기 전에 캐슬힐을 떠나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번 여행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었다. 비타민 놀이를 했던 바로 그 바위에 누워 지평선을 타고 솟아오를 별들의 세상을 볼 생각을 왜 못했는지! 어쩌면 캐슬힐에 다시 와야 할 이유 하나를 남겨둔 셈이니 너무 아쉬워하지 않아도 되려나?

여행작가 (ecoc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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