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나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 주택가에 늘어선 원룸에 산다.

내 방은 화장실 포함 5평 남짓한 공간이다. 6층짜리 건물 전체에 꿈을 좇아 상경한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산다. 내 방은 1층이라 창문 옆 오가는 사람 목소리가 고스란히 들린다. 밤늦은 퇴근길 골목을 지나며 전화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불만이 잔뜩 묻어 있다. 두 남성이 지난주 금요일 밤 10시 내방 창문에 바짝 붙어 30분 넘게 심각한 얘길 나눴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두 사람 목소리엔 일주일의 피로가 잔뜩 묻었다. 둘은 근처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와 30분 넘게 서서 얘길 했다. 온갖 종류의 불안정노동을 몇 달씩 옮겨 다녔다는 A가 B에게 “실업급여 지급조건을 살펴보니 어이가 없더라”고 말했다. 또 다시 직장을 옮겨야 할 처지라 실업급여라도 받으려 했는데 여의치 않은 모양이었다. B는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면 대상 자체가 안 되더라”고 하자, A는 “우리가 가입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회사가 안 해 주는데 어쩌라는 거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두 사람은 특수고용직을 전전하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된 4대 보험에 가입한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1시간 가까이 얘길 나눈 끝에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가면서 B는 A에게 “난 오늘도 집에 들어가서 일해야 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가고 답답해서 담배를 물고 밖으로 나왔다. 연인인 듯한 20대 남녀가 나란히 걸어 왔다. 어두운 골목에 놓인 연인을 집 앞까지 배웅하러 왔다. 둘은 같은 직장에 다니는데 같이 회식을 마치고 오는 길인 듯했다. 둘 다 꽤 술기운이 있었다. 여성이 남성에게 “자꾸 자를 거라는 신호를 보내더라”며 직장 상사 흉을 봤다. 남성은 여성에게 “비서관님도 보좌관님도 그런 눈치더라”며 호응했다. 둘은 아마도 같은 국회의원실에서 일하는 인턴으로 보였다. 경력을 좀 쌓으려 했는데 몇 달 안 돼 해고될 것 같다는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럴 만도 했다. 국정감사가 곧 보좌진들에겐 무덤이니까. 국감 기간에 자기가 모시는 의원을 사회면 머리기사에 한 번이라도 올려놓지 못하면 해당 의원실에 해고 피바람이 부는 건 오랜 관행이다. 둘은 어두운 밤거리에서 이렇게 한참을 얘기하다가 남성이 여성에게 “길이 있을 거야. 한 번만 안아 보자”며 긴 포옹을 마지막으로 헤어졌다. 여성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남자친구를 눈으로 배웅한 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나라 청년은 10개월가량 취업준비해서 들어간 첫 직장에서 1년 반이 안 돼 그만둔다.(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세계에서 가장 직장을 많이 옮기는 덴마크 노동자와 비슷하다. 그래도 덴마크는 튼튼한 실업급여과 현실적인 재취업훈련 같은 고용안정망이라도 있다.

최근 쿠팡 대구 물류센터에서 일하던 20대 일용직과 30대 한진택배 노동자가 잇따라 쓰러졌다. 물류쪽에서만 올 들어 10번째 사망자다. 택배노동자과로사대책위원회는 지난 19일 한진택배 본사 앞에서 회견을 열어 “심야배송을 강요하고도, 고인이 하루 200개 내외로 다른 기사보다 적게 배송했고 지병이 있었다고 거짓말을 일삼는 한진택배에 분노감이 치민다”고 했다.

대책위는 “얼마 전 심야배송은 하지 않겠다는 공동선언을 발표한 고용노동부도 고인의 죽음에 응당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잇단 택배노동자 사망에 이재갑 장관은 19일 ‘고용노동 위기대응 TF 대책회의’를 열어 “산재적용 제외신청서를 전수조사하겠다”고 발표했다. 문제가 터지기 전엔 절대 안 움직이는 관료행정의 전형이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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