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용우 변호사(민변 노동위원회)

대상판결 / 서울행정법원 2020. 9. 11. 선고 2017구합84082 판결

1. 최근 서울행정법원은 반도체 및 LCD 공장에서 약 12년 동안 노광장비(반도체의 재료인 웨이퍼나 LCD의 재료인 글라스에 빛을 쬐어 회로패턴을 형성시키는 장비)의 설치 및 유지보수 업무를 수행한 노동자가 폐암으로 사망한 사건에서 고인의 사망을 업무상재해로 인정했다(서울행정법원 2020. 9. 11. 선고 2017구합84082 판결). 이 판결은 근로복지공단이 항소를 제기하지 않아 확정됐다.

2. 고인은 2000년 12월 노광장비 설치 및 유지보수 업체에 입사해 2005년 4월30일까지는 삼성전자 화성공장에서, 2005년 5월1일부터 2005년 7월까지는 엘지디스플레이 구미공장에서, 2005년 8월부터 폐암(비소세포성 선암) 진단일인 2012년 6월15일까지는 엘지디스플레이 파주공장에서 근무했다. 고인은 투병 중 2013년 6월28일 만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고인의 배우자는 고인의 사망이 업무상재해에 해당한다며 2014년 2월 공단에 유족급여 및 장의비를 청구했다. 그러나 공단은 2016년 11월 실시된 직업성폐질환연구소의 역학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2017년 3월28일 “고인의 업무내용상 발암물질인 비소나 전리방사선에 노출될 가능성이 낮고, 노출됐더라도 노출농도가 낮으며, 폐암을 유발할 만한 다른 발암물질에 노출됐다는 증거도 불충분하므로 업무 관련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업무상재해를 부인하는 처분을 했다. 고인의 배우자는 이에 불복해 재심사청구를 했으나 산재재심사위원회는 2017년 7월27일 같은 이유로 재심사청구를 기각했고, 이후 배우자는 2017년 11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4. 이 사건 소송에서 원고는 고인이 근무한 공장과 공정, 근무실태와 근무환경, 노출 유해물질의 종류와 정도, 근무형태, 과로 및 스트레스 요인 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평소 고인의 건강상태와 과거력 및 가족력, 이 사건 상병의 호발연령과 의학적 특징 등을 종합할 때 업무와 폐암 발병 및 이로 인한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 사건 소송에서 원고는 전문가 의견서, 업무관련성 평가서, 동료의 상세 진술서, 직업환경의학회와 호흡기내과에 대한 진료기록감정 신청, 고용노동부와 삼성전자에 대한 작업환경측정 결과에 대한 문서제출명령 신청을 해 위 주장 사실을 뒷받침하고자 했다.

5. 1심 제기 후 약 3년 동안의 지난한 소송 과정을 거쳐 법원은 비로소 고인의 사망을 업무상재해로 인정했다. 법원은 먼저 이른바 희귀질환이나 첨단산업 현장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유형의 질환과 업무와의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이 현재 의학과 자연과학 수준에서 곤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인과관계를 쉽사리 부정할 수는 없고, 직접적인 증거가 없더라도 여러 사정을 고려해 합리적 추론을 통해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고 봤다. 유해요인의 복합적·누적적 노출이 특정 질환의 발병·악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등의 최근 판례 법리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여기에 법원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 시행령만 보더라도 폐암 유발물질의 범위를 확대하고 있는 점, 첨단산업 현장에서 발생하는 유해물질과 질병과의 관련성에 대한 연구결과가 불충분하거나 관련성 규명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 반도체 및 LCD 사업장에서 사용되는 화학제품의 성분이 영업비밀에 해당해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 점 등을 업무상질병 판단에 있어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이러한 법리를 기초로 법원은 다음과 사정 즉, 고인이 전리방사선·벤젠·니켈·포름알데히드 등에 노출됐을 가능성, 이러한 노출이 그 정도가 미미하더라도 폐암과의 관련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 직업성폐질환연구소의 작업환경평가는 과거 고인의 근무 당시 작업환경을 그대로 반영했다고 할 수 없는 점, 노광장비의 설치 및 유지보수 노동자는 일반적인 노동자에 비해 비정상적 상황에 노출돼 위험성이 높은 점, 클린룸의 환기시스템과 클린룸 내 상주 및 이동 간에 타 공정의 유해물질에 노출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점, 고인의 폐암 발병 연령은 일반적인 호발연령에 비해 상당히 낮은 편이고 고인은 평소 과거력과 가족력도 없었던 점, 고인이 16년 이상 흡연력이 있으나 이 사건 상병인 비소세포성 선암은 폐암 중 흡연과 연관성 가장 낮고 고인의 경우 직업적 요인이 강력하게 의심된다는 감정의견도 있는 점 등을 종합해 고인의 사망은 업무와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6. 이번 판결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첫째, 첨단산업현장에서 발생하는 질병과 관련해 의학적 또는 자연과학적으로 엄격한 인과관계를 요구하는 근로복지공단의 판단을 바로 잡았다는 의미가 있다. 법원은 최근 직접적인 증거가 없거나 질병과 업무와의 관련성에 대한 연구결과가 부족하더라도 업무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를 쉽사리 배제할 수 없다는 법리를 확립했다. 그러나 공단은 반대로 업무 과정에서 노출된 개별 유해물질과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가 의학적 또는 자연과학적으로 밝혀진 바 없다면 인과관계를 부정하는, 판례 법리에 반하는 판단을 하고 있다. 이는 산재보험법의 목적과 취지, 법치행정의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심각한 문제이므로 공단은 조속히 판례 법리에 따른 판단기준을 정립해야 한다.

둘째, 이번 판결은 공단이 작업환경평가에 기초한 업무상질병 여부의 판단 과정에서 보여주는 고질적인 문제점을 바로잡았다는 의미가 있다. 첨단산업 현장에서 발생하는 희귀질환의 업무상재해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 노출 유해물질의 종류와 정도 등을 확인하는 작업환경평가가 매우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과거 근무 당시 작업환경을 최대한 그대로 재연하거나 그렇지 못하다면 과거와의 작업환경 차이를 평가서 작성에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 그런데 공단과 직업성폐질환연구소는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근래의 개선된 작업환경을 바탕으로 작업환경평가를 해 노동자들의 과거 유해물질 노출 실태를 왜곡하는 문제를 반복하고 있다. 이번 판결은 이를 정확하게 지적했다.

셋째, 노동자가 개별 유해물질에 노출기준치 미만으로 노출됐다고 하더라도 여러 유해물질에 복합적으로 노출되고 장기간 누적적으로 노출됐다면 질병 발생에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 반도체 및 LCD 사업장의 설치·유지보수 노동자의 경우 비정상적 상황 등에서 업무를 수행하므로 유해물질 노출 위험성이 더욱 높다는 점을 다시 한번 명확히 함으로써 이와 다른 공단의 판단기준 문제점을 확인했다.

넷째, LCD 공장에서 발생한 폐암을 업무상재해로 인정한 첫 판결로서의 의미가 있다. 특히, 그간 LCD 공장의 경우 역학조사 등에서 폐암 발생 가능성이 잘 인정되지 않았는데, 이번 판결은 LCD 공장에서 전리방사선·벤젠·니켈·포름알데히드 등 여러 유해물질에 노출됐을 가능성을 인정했다.

다섯째, 강력한 폐암 유발요인인 흡연력이 있더라도 다른 직업적 요인이 결부된다면 업무상재해를 인정할 수 있다는 점(나아가 이번 판결에서는 폐암의 종류에 따라 흡연이 미치는 영향의 정도가 다를 수 있다는 사정까지 인정했다), 국제암연구소의 최근 발표를 근거로 벤젠과 폐암과의 관련성을 법원에서 처음으로 인정했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

이와 같은 이번 판결의 의미는 곧 첨단산업 현장에서 발생하는 질병 등에서 드러나는 업무상질병에 대한 공단 판단의 심각한 문제점을 그대로 보여준다. 희귀질병에 대한 산재 불승인 사건이 법원에서 상당 부분 업무상재해로 인정되고 있는 상황,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확립된 판례, 산재보험법 목적과 취지, 공단의 존립 의의, 장기간의 분쟁으로 인한 재해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 등을 고려해 공단의 전향적인 태도 변화를 촉구한다.

7. 발병일로부터 8년, 산재 신청일로부터 6년7개월, 행정소송 1심 제기 후 약 3년 만에 고인의 죽음은 산재로 인정됐다. 개인의 죽음이 아닌 사회가 책임져야 할 죽음으로 인정된 것이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배우자는 목놓아 울었다.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너무나 기다렸던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기다리다 지쳐 어떤 상념조차 들지 않았을 수 있다. 그저 울 수밖에. 이번 판결은 아이들에게 아빠가 남기고 간 선물이 될 것이라는 의뢰인의 말이 머리에서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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