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민주주의가 타락하는 경로 중 하나가 금권정치다. 돈을 가진 세력이 정치인을 포획해 자신의 기득권에 유리한 제도를 유지하거나 만드는 금권정치는 국가 제도에 대한 신뢰를 하락시킨다. 공정한 경쟁과 혁신 대신 금권을 이용한 지대추구에 더 많은 자원이 몰리도록 만든다. 그래서 금권정치는 결과적으로 경제성장을 저해하고 불평등도 확대한다. 금권정치를 후진국 병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한국에서 금권정치가 만개한 계기는 1987년 대통령 선거였다. 재벌은 독재시절에는 군사력에 위협받아 군부의 하위파트너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직접선거로 대통령을 뽑기 시작하고 그 선거에 엄청난 정치자금이 필요해지자, 이들이 정치의 막후 실세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엄청난 규모의 정치자금을 무리하지 않고 뿌릴 수 있는 사람은 재벌 총수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더욱이 재벌은 법·제도를 독점 이익과 경영권 승계에 유리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대통령이 제왕적 권력을 누리고 의회가 대통령의 집권지지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한국의 정치제도에서 청와대는 재벌에게 가성비가 가장 좋은 투자처이자 보험이었다. 1987년 대선에서부터 2017년 대통령 탄핵에 이르기까지, 재벌과 대통령은 단 한 번도 연루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재벌의 금권정치가 약화했다. 박근혜 탄핵 효과였다. 재벌 중 재벌인 삼성 총수마저 구속된 상황에서 감히 어떤 재벌도 정치자금을 제공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물론 문재인 정부가 재벌과 척을 진 것은 아니다. 경제 살리기에 재벌의 투자가 필요했던 정부는 그 어느 정부보다도 재계와 자주 만났다. 다만, 이전 정부처럼 불법 정치자금을 매개로 재벌에 포획된 것은 아니었을 뿐이다.

자, 그렇다면 어쨌거나 문재인 정부 이후에는 금권정치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걸까.

불행히도 아닌 것 같다. 최근 라임 사태와 옵티머스 사태에서 폭로됐듯 금권의 주인공이 바뀐 것뿐이었다. 따지자면 이런 금권정치는 재벌의 그것보다 오히려 더 퇴행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재벌이 1960~80년대 추격성장 경제의 유산이었다면, 사모펀드의 정치인 포획은 경제성장 역사나 구조와도 무관한 그저 사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재벌체제 유산인 산업화 같은 성과가 사모펀드에는 전혀 없다. 정치권과 펀드 전주들이 국민 돈을 털어 먹은, 그야말로 금권의 가장 부패한 형태일 뿐이다.

라임 사태는 라임자산운영이 펀드 부실을 숨기고, 일종의 다단계 기법으로 투자자를 모집해 자그마치 1조6천억원의 투자금을 날린 사건이다. 감독기관인 금융감독원은 부실 의혹이 제기됐음에도, 차일피일 조사를 미루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사태를 키웠다. 그리고 이 과정에 금감원에서 파견 나온 청와대 경제수석실 행정관이 깊숙이 개입했다. 또한, 이 사기에 가담한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청와대 고위관료와의 인연을 이용한 것도 언론 보도로 폭로되는 중이다.

옵티머스 사태는 현 집권세력과 관계가 더욱 직접적이다. 5천억원을 날린 옵티머스자산운영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 말부터 사모펀드 상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안전한 공공기관 매출채권에 투자한다며 투자자를 모은 후 사기성 투자를 반복하다 파산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이 옵티머스 핵심 간부들이 더불어민주당과 매우 밀접했다는 것이다. 대표는 옛 민주통합당 후보로 전략공천을 받아 19대 총선 서울 서초갑에 출마한 사람이었고, 사기를 도운 윤아무개 변호사는 청와대 민정비서실 이아무개 행정관의 남편이었으며, 이 행정관은 펀드 사기의 핵심에 있는 한 기업의 최대주주였다. 심지어 옵티머스 펀드들은 공공 금융기관인 농협중앙회의 계열사를 통해 대부분 판매됐고, 이 펀드에 전파진흥원·한국전력·농어촌공사 같은 공공기관이 투자했다. 집권세력이 총체적으로 연루된 사기였다.

정권 차원의 비리 게이트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심각한 사태지만 검찰 수사는 꼬리 자르기와 사태 축소에 급급한 모습이다. 친정권 인사로 분류되는 검사들은 검사들이 봐도 너무하다 할 정도로 수사를 엉망으로 버려뒀다. 이러려고 검찰개혁에 나섰냐는 한탄이 여권 지지자 사이에서도 터져 나온다.

그런데 사모펀드 사태의 더 큰 문제점은 이 비리가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집권세력의 경제 노선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박근혜 때부터 현 정부까지 사모펀드 관련 규제는 ‘모험자본 육성’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가지고 해제돼 왔는데, 현 청와대는 여기에 재벌개혁이란 명분까지 더했다. 장하성·김상조 두 전·현직 청와대 정책실장이 사모펀드를 통한 재벌개혁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사모펀드가 재벌총수 일가의 전횡을 막는 견제 장치가 될 수 있다고 십수 년 전부터 주장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거리낌 없이 사기성 사모펀드에 투자한 것도 집권세력 인사들이 공유하는 이러한 경제관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확인했듯, 이들이 중심에 있었던 청와대에서는 사모펀드를 재벌개혁이 아니라 대국민 사기를 치는 도구로 쓴 고위관료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실증적으로 봐도, 사모펀드는 재벌개혁이 아니라 개인 투자자의 투기에 더 많이 사용된 것으로 나타난다.

한국에서 사모펀드는 모험자본보단 사기성 투기자본에 가깝다.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 오늘날 한국 경제는 혁신에 모험을 걸어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저성장 속에 투자처를 잃은 자본이 남아돌아 부동산이나 주식 같은 비생산적 투기가 커지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지배적 모험은 곧 고수익 투기다. 2천년대 한국 경제는 자본 부족 상태로 효과적인 자본 배분이 중요한 시기가 아니다. 과잉자본의 난동이 더 문제인 시기다. 전·현직 정책실장의 무지가 청와대를 사모펀드와 연관된 투기판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 셈이다.

어쨌든, 문재인 정부 들어 금권정치 시즌2가 열렸다. 재벌에 더해 이제 펀드 사기꾼들이 청와대를 직접 포획한다. 금권정치에도 수준이 있다면, 당연히 현재의 금권정치가 더 후진 것이다. 한국의 장기적 경제성장과 불평등도 당연히 더욱 악화할 수밖에 없다. 재벌 게이트를 청산하겠다고 나선 현 정부가 사모펀드 게이트로 망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정말로 울화가 치민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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