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20.10.25 일 07:30
상단여백
HOME 사회ㆍ복지ㆍ교육 노동복지
[지속되는 산재 트라우마 고통] “비상구 표시를 용균이로 착각했어요”마창거제산추련 ‘노동재해 트라우마’ 자료집 펴내… “산재 인정됐다고 다 해결된 것 아냐”
▲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비상구 표시를 보는 순간 용균이라는 착각이 들었어요. 용균이가 누워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하얀 게 점검 창 같은 생각이 들고. 숨이 막혀 가지고 막 몸에 땀이 나고 숨을 못 쉬겠더라고. 가슴이 오그라지는 걸 느꼈어요. 이게 막 자꾸만 오그라져. 그러면서 손에 땀이 엄청나게 나더라고. 내가 왜 이러지 하는데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태안화력발전소 고 김용균씨 사고 목격자 A씨)

“멀쩡하게 아무렇지 않다가도 밤에 갑자기 쾅 소리 나면 다리가 계속 부들부들 떨리면서 멈춰 지지가 않아요. 왜 그런지도 모르겠고 계속 움직일 수가 없고, 숨도 막혀 오고, 그러고 나서 정신 차려 보면 땀 나 있고. (날이 더운데도) 계속 추워서 오한이 있어서 해열제를 먹었어요.”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 피해자 B씨)

A씨와 B씨는 서로 다른 사고를 경험했지만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라는 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 2017년 삼성중공업 크레인 충돌사고 이후 B씨를 포함해 13명이 트라우마를 업무상질병으로 인정받았고, A씨도 산재승인을 받았다. 하지만 노동계에서는 산재승인이 끝이 아니라 이들이 사회로 복귀할 수 있도록 지속적·통합적 치료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7일 <매일노동뉴스>가 입수한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자료집 ‘노동재해 트라우마 : 사회적 치유와 회복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는 14명의 트라우마 관련 증언을 통해 이들의 증상을 분류하고, 진정한 치유를 위한 대책이 무엇인지에 대해 전문가들의 제언을 담았다.

14명의 노동자는 대체로 일상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사고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는 재경험을 반복하고 외부자극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과각성 증상을 겪고 있다.

해리현상으로 의식상실을 경험하기도 한다. “통째로 기억이 안 나는데 고속도로에서 제가 후진을 했대요.”(B씨)

불면증이나 환영 등에 시달리는 노동자도 있다. “2~3일간 잠을 못 잘 때도 있고, 환영·환청 그런 게 계속 있다.”(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 피해자 40대 노동자)

‘별난 사람’ 취급 여전 … 지속적·통합적 치료의 부재

문제는 정신적 외상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고통에 대한 책임이 개인에게 전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에 만연한 정신과 치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고통을 호소하는 노동자를 ‘별난 사람’으로 취급해 조기 치료를 막는 장벽이 된다.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과 친구들도 예외는 아니다.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 피해자 30대 노동자는 “아무리 친하고 가족이라 해도 그냥 일 안하는데 돈 나오는 거 그것만 부러워한다”고 밝혔다.

산재신청 과정에서 근로복지공단 관계자에게 상처를 입는 경우도 있다. B씨는 공단 과장과의 통화에서 “‘산재가 된다고 해서 뭐 얻어 낼 수 있는 것도 없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하더라. 그리고 전화 끊으면서 ‘제가 듣기에는 되게 건강하게 들리시는데’ 이렇게 말도 했다. 굳이 스트레스 받으면서 (산재 신청) 하고 싶지 않다”고 증언했다.

PTSD에 대한 협소한 인식은 지속적·통합적 치료의 부재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14명 노동자의 증언에 따르면 산재가 인정되더라도 대다수는 약물 중심 치료에 의존하고 있었다. 진료시간은 10분 이내로 신경안정제 같은 약만 처방받는 경우가 많았다.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 피해자 40대 노동자는 “산재인정 됐다고 다시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닌데 마치 다 해결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말했다.

“약물치료뿐 아니라 복귀프로그램 병행해야”

전문가들은 약물치료를 넘어 치료와 복귀프로그램을 병행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트라우마를 겪은 노동자는 증상이 호전됐다고 해도 동일직종으로 복귀하기에는 여러 어려움이 수반된다. 마창거제산추련은 “산재를 인정받은 경우에도 트라우마에 대한 장애 인정 기준이 현저히 낮아 복귀지원프로그램 지원대상에 극히 일부만 포함된다”고 지적했다. 근로복지공단 직업재활급여자 직업재활프로그램은 산재 장해등급 1~12등급까지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14등급인 트라우마 산재피해자들은 참여할 수 없다.

정부가 운영하는 직업적 트라우마 센터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지난 3월 본격적으로 출범한 직업적 트라우마 전문상담센터는 전국 8곳에 불과하다. 이은주 마창거제산추련 사무국장은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대구 사건을 충남에서 나눠서 해야 할 정도이며 광주에서는 상담사를 구하지 못해 운영을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 사무국장은 “지원대상을 산업안전보건법이 정한 중대재해로 정하고 있고, 50명 미만 사업장 등에 한정하고 있는 점도 문제”라고 덧붙였다.

노동자의 정신건강과 관련해 사업주의 예방의무를 구체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김재광 공인노무사(노무법인 필)는 “정신장애가 사회 문제라는 데 대부분 동의하지만 이에 대한 법적 규범과 보호는 빈약하다”며 “산업안전보건법 39조(보건조치)에 정신건강 침해 방지를 위한 예방의무를 추가해 실효성 있는 사업주 의무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고은  ago@labortoday.co.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어고은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