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한국 사회에서는 아픈 것을 참으면서 일하는 것이 성실함의 징표였다. 그런데 코로나19 이후 “아프면 집에서 3~4일 쉰다”가 새로운 상식이 됐다. 문제는 우리나라 기업과 노동관행에 ‘아프면 쉬는’ 문화가 정착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K방역이 성공했을지라도 우리나라는 여전히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유급병가와 상병수당 모두 없는 나라’로 꼽힌다. 세계 184개국 중 유급병가와 상병수당이 없는 나라는 미국과 우리나라를 비롯한 9개국뿐이다. 코로나19가 장기화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23일 오후 세종국책연구단지에서 개최된 한국노동연구원 개원 23주년 기념 세미나는 코로나19 이후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을 모색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세미나는 온라인으로도 중계됐다.

코로나19가 노동에 미친 영향은?

노동연구원은 6월 개인 2천500명과 기업 1천500곳을 대상으로 코로나19 대응 실태조사를 했다. 조사 결과 코로나19로 실직한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5%였다. 실직 노동자는 비임금노동자가 5.6%로 임금노동자(5.1%)보다 많았다. 코로나19의 피해는 특히 비임금노동자에게 집중됐다. 이들 100명 중 4명은 폐업하거나 도산했다. 비임금노동자 중 매출액과 사업소득이 감소했다는 응답은 86%나 됐다. 감소수준은 평소 대비 38.5%였다. 임금노동자 역시 28.7%가 코로나19로 고용조정까지는 아니지만 근로시간단축, 비자발적 휴가·휴직으로 근로소득이 감소했다고 응답했다.

기업체도 60%가 매출이 감소했다고 답했다. 감소 폭은 예년 수준의 3분의 1이다. 반면 임차료나 경영비용 같은 지출수준은 크게 변하지 않아 경영상 어려움이 배가된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를 한 김유빈 노동연구원 패널데이터연구실장은 “그나마 고무적인 사실은 일자리 상실 규모가 과거 감염병·경제위기에 비해 다분히 억제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라며 “정부가 고용유지지원금을 확대하는 등 고용안정망을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고, 기업도 경영위기 속에서 고용조정을 최소화하면서 한시적 휴직·휴가를 활용하는 움직임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조사 결과 고용조정을 실시한 기업은 3.6%였다. 김 연구실장은 “코로나19 이후 일하는 방식이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며 “시간의 자율성과 근무장소의 유연성이 확보된 유연근무제가 일·생활 균형을 위한 기업 문화 정착과 기업생산성 향상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아프면 쉴 권리,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아프면 쉴 권리는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보편적 권리일까? 남궁준 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보건의료노조 단체협약 데이터베이스와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 알리오에 등록한 단체협약을 분석했다. 그 결과 보건의료노조 단체협약 126개 가운데 92.1%, 단협 공시 공공기관 265곳 가운데 76.2%가 병가 규정을 두고 있었다. 60일 유급휴가를 보장했고 통상임금 또는 평균임금의 100%를 지급하도록 명시한 경우가 다수로 확인됐다. 병가 사유가 발생한 경우 연차휴가와 상관없이 병가를 활용할 수 있는 곳도 있지만 일정 일수만큼은 연차휴가를 우선 사용하도록 명시한 곳도 있었다. 남궁준 부연구위원은 “단협상 병가제도를 보편적 권리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병가제도를 입법화하고 단협 효력확장제도를 시행해 무노조 사업장의 모든 노동자가 적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새로운 사회경제 체제로 전환하는 길 ‘신사회협약’

박명준 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바이러스 위기가 종식된다 해도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무한경쟁에 기대는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의 전개와 이를 위한 규제완화 경쟁은 지속할 수 없다”며 신사회협약을 체결해 새로운 사회경제체제로 체질 개선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국에서도 이미 새로운 사회경제 체제의 맹아가 만들어지고 있다. 특히 지역에서 이런 움직임이 거세다. 서울시와 경기도가 재난지원금을 선도하면서 기본소득 논의의 물꼬를 텄고, 전주시의 해고 없는 도시 캠페인도 우리 사회에 새로운 가능성을 던졌다.

박 연구위원은 “코로나19 위기 발발 이후 정치는 아직까지 ‘포스트 코로나 한국’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며 “한국판 뉴딜이나 7·28 원포인트 노사정 합의에 새로운 사회경제 체제의 맹아적 요소는 담고 있지만 질적 전환으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무엇보다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산업적 시민권’을 최대한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현재 노동자들의 산업적 시민권은 고용형태에 따라, 기업규모에 따라 차등적으로 부여돼 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새로운 사회경제 체제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박 연구위원은 ‘신사회협약’을 지목했다. 2022년 대선을 앞두고 있는 지금 노사정 합의 틀을 뛰어넘는 새로운 사회적 협약을 만들어 사회개혁을 도모할 때라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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