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1925년 7월 서울은 한강이 범람해 물난리를 겪었다. 한강 최대의 홍수인 ‘을축년 대홍수’다. 전국에서 사망자 647명, 재산 피해도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에 해당하는 1억300만원에 달했다.

87년 뒤인 2012년 9월24일 한강홍수통제소가 을축년 대홍수비 복원 행사를 열어 이를 기념했을 정도이니 당시 홍수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간다. 한국 최초의 여기자라는 조선일보 최은희씨는 홍수가 나자 조선여자청년회·경성여자기독교청년회·조선여성동우회 등의 회원을 중심으로 구호반을 조직했다. 자동차에 ‘조선일보 부인구호반’이라는 깃발을 꽂고 이재민에게 구호품을 나눠 주고 밥을 해 먹였다고 최씨는 회고했다. 사실 최은희는 한국 최초의 여기자가 아니다. 최씨는 1924년 조선일보에 입사했는데, 이보다 4년이나 앞서 매일신보엔 이각경 기자가 입사했다.

당시 최씨가 이재민에게 구호품을 나눠 준 곳이 지금의 서울 용산구 이촌동 한강변이다. 당시 이곳엔 강을 따라 2천여채의 무허가 판잣집이 있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홍수가 나 집이 물에 잠기고 주민들은 피신했다. 그래서 지명도 지금의 ‘두 마을 이촌’이 아닌 ‘옮기는 이촌’이었다.

버려진 땅 이촌동은 67년 김현옥 서울시장이 한강 공유수면을 매립하면서부터 금싸라기가 됐다. 이른바 한강변 개발계획이다. 아파트 문화를 선도한 동부이촌동은 67년 설립된 한국수자원개발공사의 1호 사업이었다. 소양강댐 건설 재원을 마련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68년 착공해 69년 6월 준공된 약 12만2천평의 매립지 중 도로와 제방을 뺀 약 9만평이 수자원공사에게 돌아갔다. 이 사업에 고위공무원과 장성들이 달려들어 한몫씩 챙겼다.

69~70년대 초반 공무원아파트(69년)·한강맨션(70년)·외국인 아파트 등이 들어서면서 사대문 안에 살던 중상류층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서울시청 공무원 직장주택조합도 여기에 아파트를 지었다. 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들어온 일본인도 이곳에 몰려 동부이촌동을 ‘리틀 도쿄’라 부르기도 했다. 지금도 이촌역 4번 출구 앞 강촌·한가람·장미·한강맨션 아파트 인근엔 일본 음식점이 꽤 있다. 이렇게 한강 백사장을 낀 이촌동은 아파트가 즐비한 부촌이 됐다. 이촌동은 80년대 중반 강남에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 한국의 베벌리힐스였다.

이때 지은 공무원아파트를 헐고 98년 9월 건영이 2천36여 세대의 한가람아파트를 준공했다. 공무원아파트 재개발이 건영에 넘어간 걸 두고 92년 국회 건설위 국정감사장에선 민주당 이석현 의원이 “건영의 동부이촌동 공무원아파트 재건축사업에 뚜렷한 특혜의혹이 있다”고 지적했지만 유야무야 됐다.

최근 동부이촌동의 상징인 한가람아파트가 재건축에 나섰다.(매일경제 7일27면 ‘동부이촌 대표선수 한가람 리모델링 시동건다’) 이 나라 개발계획이란 게 다들 이런 식이었다. 목 좋은 곳은 고위공무원과 권력자들이 먼저 깔고 앉아 한몫 잡은 뒤 민간에 넘겨주는 식이었다. 국민들은 부동산 투기에 신물을 내는데도 이 정부 들어서도 동부이촌동 재개발 움직임은 멈추질 않는다. 정부가 부동산 시장에 이상한 신호를 계속 줘서다. 참여정부 실패의 경험을 안고 출발한 문재인 정부는 이런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했지만, 너무 늦었다. 엔진 없는 바지선처럼 재벌이 끌면 재벌 쪽으로, 관료들이 끌면 관료들 입맛대로 끌려가는 덩치만 큰 멍텅구리배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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