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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사적 복지국가’의 역사적 기원

1920년대 미국에서는 호황기에 열심히 일하면 높은 임금·가정 복지·소비문화 참여를 누릴 수 있다는 기대가 노동자들 사이에 넘쳐났다.

‘복지자본주의’ ‘회사노조주의’ ‘자발주의’ 이데올로기가 횡행했으나, 노동자들의 단결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노동자 대표도 법의 지배도 없었다. 공장과 사업장에서 개별 노동자 보호는 언감생심이었다. 당연히 노조 조직률은 급락했다. 1920년에 500만명이던 조직 노동은 1923년 350만명으로 급락했고, 이러한 상태는 1930년까지 이어졌다. 1930년 대규모 완성차공장에서 노조원은 1%도 안 됐다. 조직률은 계속 떨어져 루스벨트가 대통령 임기를 시작하던 1933년에는 269만명(5.2%)으로 바닥을 쳤다.

하락하던 노조 조직률 추세는 1기 루스벨트 정권(1933~1936년)에서 이뤄진 뉴딜의 노동개혁으로 반등했다. 산업별노조주의를 지향한 산별노조위원회(Committee for Industrial Organization)가 8개 산업별노조를 기반으로 미국노동연맹(AFL) 내부에 등장한 1935년 6.7%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후 산별노조위원회가 AFL에서 산별노조회의(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 CIO)로 개명하고 분리해 나온 1938년에는 14.6%로 두 배 이상 급증했다. 그리고 미국이 전쟁에 참전한 1941년 17.7%, 전쟁이 끝난 1945년에는 21.9%까지 치솟았다.

이렇게 해서 1930년대와 40년대는 미국 노동운동의 전성기가 됐다. 전통적 산업의 백인 숙련공 중심 직업별 노조주의에서 2차 산업혁명에 따른 대량생산 체제의 미숙련·반숙련공 중심 산업별 노조주의로 전환했다.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이 조합원으로 받아들여졌다. 노동운동의 새로운 흐름은 CIO가 촉발시켰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전국전쟁노동위원회(NWLB)에서 노사정 3자 협력 체제 구축에 따른 무파업 선언이 있었지만, 전쟁 중에도 파업은 계속됐다. 물론 파업의 규모와 기간은 1930년대 파업과 비교할 때 크게 약화됐다. 온건 성향의 AFL은 물론 강경 성향의 CIO도 현장의 불만 제기에도 전쟁 기간에는 파업을 감행하지 않았다. 전쟁노동위원회에 참여하면서 ‘산업 안정’의 대가로 ‘노조 안정’을 획득했다. 덕분에 전쟁 기간 동안 조직 노동은 양적으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하지만 견고한 제도적 기반을 다지는 데서 미국 노동운동, 특히 CIO는 이룬 게 별로 없었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 국가와 자본에 대항한 경기에 참여하기 보다는 제도 밖에서 경기장에 압력을 가하는 ‘구경꾼’의 태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투쟁이 확산할수록 문제 해결을 위해 정당과 정부에 대한 의존 역시 커졌다. CIO의 전투주의는 타협적인 민주당에 대한 의존과 동전의 양면을 이뤘다.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투쟁력은 애국주의 열풍과 섞여 버렸고, 전쟁이 끝나고 냉전이 도래하면서 반공주의에 포섭됐다. 현장 중심 활동이 약화하고 분쟁 해결에서 법률적 해석과 절차를 중시하는 법률주의가 강화됐다.

루스벨트의 뉴딜이 절정이던 1930년대 CIO를 비롯한 미국 노동운동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활발한 단체교섭을 통한 임금 인상, 연금과 의료보험 제공, 작업장 지배체제에 대한 영향력 행사가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단체교섭은 기업 수준에 머물렀고, 노사관계 역시 기업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전국 수준에서 제도 변화를 모색하려는 노력은 이뤄지지 못했다.

현장 전투성에 만족하면서 사회적 임금·보편적 실업보험·보편적 건강보험·보편적 일터 민주주의를 위한, 전체 노동계급과 민중을 위해 노동시장과 사회보장을 둘러싼 제도적 교섭과 전국적 투쟁에 나서지 못했다. 물론 “특정 사용자가 제공하는 개별 이익”을 둘러싼 투쟁에서는 CIO의 강점인 “현장 전투성”이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공공보건·국민연금·공공실업부조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현장 전투성에 더해 전국 중앙 수준의 교섭을 통한 제도적 개선이 필요했다. 그 점에서 노동운동은 자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지도라는 미명하에 현장의 투쟁력과 동원력에만 의존하면서 제도 설계와 정책 결정이 이뤄지는 시스템 밖에서 정당과 정부에 대한 정치적 로비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관성은 역으로 노동운동의 무게 중심이 ‘특정 사용자가 제공하는 개별 이익’이라는 ‘사적인 봉건 제도’를 쟁취하는 투쟁에 쏠리게 만들었다.

기업 울타리 안에서도 정보와 협의와 참여 확대를 통해 생산 현장을 운영하는 지배구조를 민주화하려는 노력보다는 ‘기업 성장’의 열매를 공유하려는 전투적 동원에 노조활동의 초점이 맞춰졌다. ‘사적인 복지국가(private welfare state)’를 쟁취하기 위한 조직 노동의 전략이 성공할수록, 저임금·저혜택 노동자들과 노동운동 사이의 간격은 더 벌어졌다. 노조는 취약노동자들로부터 멀어져 갔다. 노동운동의 활동 방식이 전국노동관계위원회(NLRB) 중재와 법원 판결에서 행해지는 우호적인 법률 해석으로 축소됐다. 그러면서 노조운동은 지배층의 연단에서 노동자들의 불만을 호명하고 그 해결책과 대안 마련을 향해 분투하는 ‘전투적 호민관’이 되지 못하고, 그 연단 밖에서 정당과 정부에 압력을 넣기 위해 집회나 시위를 조직하는 ‘행정 관료’로 기능하였다.

이런 문제점은 1950년대와 1960년대 인종 평등과 인종 통합을 위한 시민권 운동에서 노동운동이 제대로 된 리더십을 보여주는 데 실패하는 역사적 실기의 경험으로 이어진다. 1930년대는 CIO라는 새로운 운동의 탄생기였던 동시에 20세기 후반 들어 미국노동운동이 쇠퇴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제약과 전략적 한계를 동시에 배태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중장기적으로 노동운동의 대중적 영향력과 정치적 존재감은 약화됐고,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상관 없이 민주당에 대한 의존성은 더욱 커졌던 것이다.

아시아노사관계(AIR) 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윤효원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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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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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동자 2020-09-15 15:12:31

    기업 울타리 안에서도 정보와 협의와 참여 확대를 통해 생산 현장을 운영하는 지배구조를 민주화? 미친소리 하지마라! 어느 국가폭력기구와 정부와 자본가들이 이걸 원하냐? 스웨덴? 노르웨이? 프랑스? 이런 나라들은 자기 나라들에서는 못하고 식민지처럼 제3세계 국가에 공장세워서 협의와 참여는 팽겨쳐두고 착취만 일삼고 있는 나라들의 자본들이다. 한쪽눈만 뜨고 보면 국가와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위해서 시스템을 함께 만들어줄 수 있는 착한 천사들이다. 두 눈 똑바로 매섭게 봐야 보인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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