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훈 여행작가

뉴질랜드는 여행자들뿐만 아니라 영화감독들에게도 꽤 인기 있는 촬영지다. 그중에서도 <피아노>와 <반지의 제왕>이 가장 인연이 깊고, 모두가 잘 알만한 영화다. <피아노>는 나온 지 30년이 다 돼가는 탓에, 연식이 좀 되는 영화팬들이나 떠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영화는 안 봤더라도 바닷가에 덩그러니 놓인 피아노를 연주하던 여주인공의 모습은 한 번쯤은 봤을 법한 장면일지도. 영화 <피아노> 촬영지인 ‘카레카레 해변’은 단단하면서도 고운 검은 모래가 깔린 바닷가다. 오클랜드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차로 1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곳이다. 물론 모래사장에 피아노가 있을 리는 없지만, 독자들이 이곳에 갈 즈음에는 혹시 모를 일이다. 영화 장면을 해변과 동기화시켜서 볼 수 있는 그런 증강현실 어플이 나와 있을지도.

그래도 역시 뉴질랜드와 영화라는 키워드 조합에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가 딱이다. 영화 배경이 뉴질랜드 전국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감독이었던 필 잭슨이 워낙 뉴질랜드 덕후여서 그런 탓도 있지만, 다양한 지형과 계절을 한 번에 찍을 수 있는 곳으로는 뉴질랜드만한 곳이 없는 것도 한 이유가 된 것 같다. 역대급 블록버스터로 이름을 올렸던 <반지의 제왕>시리즈가 나온 지도 벌써 15년이 넘어 20년이 다 돼 가고 있지만, 영화가 남긴 흔적을 찾는 여행자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고 있다.

그중에서도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시그니처 코스는 ‘호비튼 마을’이다. 오클랜드에서 남쪽으로 1시간 정도 달리면, <반지의 제왕>을 위해 지어졌던 세트로는 거의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호비튼 마을에 닿는다. 잔디와 넝쿨에 덮인 키 작은 집들은 한결같이 동그란 문과 창문을 두고 있다. 동글동글한 성격의 호빗들과 닮은 모습이다. 마을의 핫플레이스인 ‘그린 드레곤 인’에 들러 흑맥주 한잔을 들이키며 다가올 반지 원정을 준비해 보는 것도 제법 그럴 듯해 보인다.

호비튼 마을이 반지원정대의 시작점이라면, 원정의 마침표는 악의 결정체인 사우론의 근거지 ‘모르도르’다. <반지의 제왕>은 결국 프로도 일행이 절대반지를 녹여 없애기 위해 모르도르를 향해 나아가는 여행을 그린 영화이니까 말이다. 그러니 호비튼 마을을 봤다면 다음은 모르도르를 향해 나아가는 게 인지상정! 차를 타고 로토루아를 거쳐 더 남쪽으로 달린다. 로토루아 호수보다 몇 배는 더 큰 타우포 호수를 지나면 얼마 가지 않아 통가리로 국립공원에 들어선다.

통가리로에는 두 개의 큰 산이 양쪽에 버티고 있다. 루아페후산과 나우루호에산이 그 둘이다. 루아페후산은 스키장으로, 나우루호에산은 트래킹으로 이 동네에서는 꽤나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이 남긴 흔적을 찾고 있는 원정대에게 가장 의미가 있는 곳은 루아페후산 스키장 바로 옆에 있는 미즈월(Meads Wall)이란 곳이다. 이곳은 <반지의 제왕>에서 주인공 프로도와 그의 시종이었던 샘이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이었던 골룸을 사로잡은 장면을 찍은 곳이다. 시커먼 화산석이 벽돌처럼 이어 붙어 올라온 미즈월은 그 생김새가 마치 무너진 성벽 같은 느낌이라 이름에 ‘월(Wall)’이 붙었다. 위태로워 보이는 지형이지만, 오르는 일이 보이는 것만큼 위태롭지는 않다. 다만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좀 더 조심해야 하고, 인생 셀카 찍겠다고 바위 끝에서 나대는 일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미즈월 끝에 올라서서 바라본 벽 너머의 풍경은 그냥 끝판왕이다. 세상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깊은 협곡이 난데없이 펼쳐지니 눈동자가 잠시 초점을 어디에 맞춰야 할지 당황한다. 그 깊고 기다란 협곡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바닥에 붙은 듯 낮고 넓은 초원과 평야가 나타난다. 그 사이를 용트림하듯이 굽이쳐 흐르는 하천의 모습도 경이롭다. 마침내 눈길의 끝이 세상의 끝이라도 되는 양 반대편 끝에 버티고 선 또 다른 산 ‘나우루호에’에 이르면 이 완벽한 경치는 완성된다. 봉우리에 움푹한 분화구를 이고, 그 위로 쉴 새 없이 화산재인지 구름인지 분간이 안 되는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나우루호에 화산의 모습은 구름이 잔뜩 끼거나, 어둠이 내리는 시간에 마주한다면 모르도르 그 자체일 것처럼 느껴졌다. 검회색의 화산석이 정상에서부터 쏟아져 내리는 듯한 형상에, 그 사이사이의 주름을 따라 오래된 눈이 흰머리처럼 쌓여 있다. 그 모습이 마치 세상의 끝이자, 사악한 악마 사우론이 또아리 틀기에 안성맞춤인 바로 그곳이다. 누가 카메라를 들고 찍는다해도 그곳은 모르도르가 될 그런 분위기다.

나우루호에산은 가이드 없이 즐기는 하루짜리 트래킹 코스로도 유명하다. 정상 근처에 있는 두 개의 호수를 보게 된다면, 공양미 삼백석에 눈이 떠진 심봉사처럼 개안하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호수 빛깔을 따라 붙여진 이름인 에메랄드 레이크와 블루 레이크. 그 이름만으로도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주차장에서 출발해 부지런한 이들이라면 5~6시간이면 되돌아올 수 있다. 이 정도 노력으로 반지원정대의 마지막 원정지를 찍고 올 수 있다면 투자해 볼 만한 일이다.

여행작가 (ecoc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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