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운규 <공훈전자사료관>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영화인 이전에 독립운동가.

한국 영화에 관심이 있는 한국인 중에 나운규(羅雲奎, 1902~1937)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한국 영화사에서 불멸의 업적을 남긴 감독이자 배우다. 특히 영화 <아리랑>의 주인공으로서 일제 시기 고통받고 있던 한국인의 가슴에 깊은 인상을 심어 줬던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유명 영화인이기 전에 독립운동가였고, 1993년 애국장 서훈을 받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나운규는 1902년(북한에서는 1901년으로 추정)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춘사(春史)라는 호가 널리 알려져 있다. 아버지 나형권(羅亨權)은 대한제국 무관 출신으로 군대해산 후 회령에서 약종상을 했다. 나운규는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간도의 명동중학에서 공부했다. 회령과 간도 용정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지척이었다.

일제에 주권을 강탈당한 뒤 많은 이들이 만주로 망명해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특히 간도에는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살았다. 동흥중학·명동학교·은진중학 등 민족학교들이 세워져 독립운동가를 양성하는 등 민족운동의 요람 역할을 한 곳이었다. 명동학교는 ‘간도 대통령’으로 불렸던 독립운동가 김약연이 세운 민족학교로 소학부 보통과·고등과, 중학부, 여학부가 있었다. 민족시인 윤동주, 독립투사 송몽규, 한국 민주화운동의 대부였던 문익환 목사가 모두 명동소학교 출신이다.

독립군 활동으로 감옥살이 후 인생 항로 전환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간도 명동중학생들이 중심이 돼 회령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는데, 나운규도 회령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경찰의 수배를 받았다. 일제의 추적을 피해 연해주로 간 나운규는 러시아 혁명 발발로 내전이 한창이던 시베리아를 방랑하다가 러시아 백군 용병으로 입영했다. 하지만 용병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탈영해 훈춘을 거쳐 북간도로 돌아왔다.

3·1운동 후 간도를 비롯한 만주에서는 무장독립운동이 활기를 띠었고, 나운규는 독립군 단체의 하나인 도판부(圖判部)에 가입했다. 나운규의 은사였던 박용운(朴龍雲)이 책임자였던 도판부는 독립군이 간도에서 회령으로 진격하기 전 터널이나 전신주를 파괴하는 임무(무산령 폭파 사건)를 띤 결사대였다. 준비를 위해 청산리 인근으로 갔던 나운규는 그곳에서 만난 나이 지긋한 독립군에게 “당신 똑똑한데 군대 말고 공부를 하라”는 충고를 듣게 됐다.

나운규는 서울에서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예비과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훈춘사건’(일본군이 마적에게 돈을 줘 훈춘 영사관을 습격하도록 하고 독립군이 했다고 조작한 사건)을 일으켜 북간도로 출병한 일제는 비밀문서를 확보해 도판부 책임자 박용운 등을 체포하고 나운규 등 관련자들까지 체포했다. 나운규는 재판에 회부돼 보안법 위반으로 2년형을 선고받고 1921년 3월부터 1923년 3월까지 청진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23년 감옥에서 나온 나운규는 1924년 1월 조선 북부지역을 순회하던 극단 예림회가 회령을 방문했을 때 예림회에 가입했다. 예림회는 함흥에 동명극장과 함흥극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관동대지진 여파로 고향에 돌아온 동경 유학생 출신들이었다. 나운규는 예림회 산하 민중극단 신입회원으로 가입해 연극배우 활동을 시작했으나 예림회는 얼마 가지 않아서 자금난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

영화 <아리랑>의 성공, 나운규 시대가 열리다

나운규는 서울로 가서 공부를 하던 중 민중극단 문예부장 출신 안종화의 소개로 일본인 실업가들이 세운 부산의 조선키네마 주식회사 연구생으로 들어가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나운규는 조선키네마 주식회사의 두 번째 작품인 <총희의 연>(일명 <운영전>, 연출 윤백남)이란 작품에 출연해 배우로 데뷔했다. 1925년 이후 윤백남이 세운 ‘백남프로덕션’이 제작한 <심청전>, <흑과백>, <장한몽> 등에 연속 출연하며 특색있는 배우로 주목받았다.

나운규는 일본인 모자상인 요도 도라조(淀虎藏)가 세운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 입사했는데 그 회사가 두 번째 작품으로 제작한 것이 나운규 주연의 <아리랑>이었다. 아리랑은 당대의 현실 문제를 이야기하면서도 곳곳에 서양 활극영화와 같은 박진감 있는 장면들을 포함시켜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데 성공했다. 관객이 쏟아지면서 조선키네마는 큰 돈을 벌었고, 나운규는 일약 조선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주목받게 됐다.

조선키네마는 이어 나운규 주연의 <풍운아>를 제작했는데 이 또한 크게 성공했다. <아리랑>보다 활극적 요소가 강했던 이 작품은 시나리오 없이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촬영하면서 예림회 시절의 동료였던 주인규 등과 갈등을 빚었다. 주인규 등이 떠난 자리를 메운 것은 나운규의 연락을 받고 회령에 내려온 윤봉춘(한국 영화 1세대를 대표하는 감독)이었다.

나운규는 1927년 <들쥐>, <금붕어>를 계속 히트하며 조선영화계의 스타로 군림했고, 그는 흥행의 보증수표가 됐다. 이에 단성사 운영주였던 박승필은 나운규에게 독립을 권했고, 1927년 9월 자신의 이름을 딴 ‘나운규프로덕션’을 세웠다. 나운규프로덕션은 <잘 있거라>, <옥녀>, <사랑을 찾아서>, <벙어리 삼룡> 등을 연속적으로 제작·히트했다. 특히 나도향의 소설을 각색한 <벙어리 삼룡>은 대구 만경관에서 상영될 때 관객이 너무 많아 극장 2층이 붕괴됐다. 진주에서는 무대까지 관객이 들어차 배우들이 극장에 들어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화려한 성공의 이면과 갈팡질팡 행보

그러나 나운규의 방탕하고 방만한 생활로 프로덕션이 적자를 면치 못하면서 회사 살림을 맡았던 형 나민규가 손을 뗐다. 동료들도 나운규에 반기를 들고 회사를 떠났다. 나운규는 조선을 떠나 일본 영화의 촬영소 등을 돌아보고 1929년 말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1929년 12월30일 서대문 아성키네마에서 열린 영화인 망년회에 참석했는데, 이날 조선 영화인들의 반감을 사고 있던 일간지 영화기자들의 모임인 ‘찬영회’ 성토 과정에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기자들이 찬영회를 해체하기로 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됐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나운규에 대한 좌익영화인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1930년 단성사가 주도한 <아리랑 후편>이 개봉되자 남궁옥·서광제 등은 “이 영화가 허무주의와 숙명론을 주입시키고 있다”며 공격했다. 이에 영화제작에 참여했던 이필우가 현실적인 문제를 들어 반론을 폈고, 다시 서광제의 반론이 이어졌다. 안종화·윤기정·나운규 등이 가세하면서 논쟁을 뜨겁게 달궜다. 하지만 카프영화부가 신흥영화예술가동맹 해산 문제를 두고 분열하면서 논쟁은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이후 나운규는 카프연극부 출신의 최승일과 손잡고 프롤레타리아 연극을 시도했으나 소부르주아 연극이라는 비난을 들었다. 또한 나운규는 일본 국수회 회원인 도야마 미츠루((遠山滿)가 세운 원산만프로덕션에 참여해 <금강한>(1931)이라는 영화에 출연하는가 하면, 일본첩자 배정자의 조카 배구자가 만든 ‘배구자 무용단’과 함께 순회공연을 다니는 등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나운규의 죽마고우였던 윤봉춘이 앞장서서 ‘나운규 성토대회’를 열었고, 박완식은 “나운규에 대해 아무 기대도 가질 수 없게 됐다”고 했다. 심훈은 “봉황은 천 길을 날며 주려도 조 따위는 먹지 않는다”라며 나운규의 몰락을 안타까워했다. <아리랑>으로 얻은 성공의 빛이 찬란했던 만큼 그 그림자 또한 짙었다.

재기를 위한 노력, 신화로 남다

일본에서 영화 공부를 하고 돌아온 이규환 감독이 <임자 없는 나룻배>를 강정원의 후원을 받아 제작하면서 나운규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시나리오를 받아 본 나운규는 출연을 결심하고 진지하게 성의를 다했다. 나운규는 뱃사공이라는 배역에 어울리게 삭발을 한 채 나타나 이규환을 놀라게 했다. 나운규는 혼신의 연기를 펼쳤고 <임자 없는 나룻배>(1932)는 성공했고, <아리랑> 이후를 대표하는 무성영화라는 호평을 얻었다. 그러나 단성사 박승필 사망 이후 후원자가 없어서 영화 제작이 힘든 상황이 됐다. 재기의 기회를 노리던 나운규는 1935년 조선키네마의 지원으로 <무화과>, <그림자>를 만들었다. 차상은의 자금지원으로 <강 건너 마을>을 제작해 관객들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기회를 살려 나운규는 <아리랑 3편>을 최초의 토키 영화로 만들고자 했고, 거금 3만원을 투자해 이태원에 촬영소를 만들었다. 일본에서 녹음기와 조명기를 구입해 동시녹음으로 촬영을 했다. 그러나 기술 부족으로 초점이 맞지 않고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등 실패하고 말았다. 나운규는 이 실패로 큰 빚을 지고 폐병으로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으나 쉴 수가 없었다. 경성촬영소의 제안으로 토키 영화를 제작하기로 했다. 나운규는 이태준의 소설 <오몽녀>를 영화로 만들기로 하고 성북동 집으로 작가를 찾아갔다. 두 사람 모두 결핵을 앓고 있었고 마음이 통했다. 나운규는 검열을 고려해 어떤 부분을 고칠 것인지를 상의하고 곧바로 영화제작에 착수했다. 나운규가 쇠약한 몸에 주사를 맞아 가며 분투한 끝에 완성한 <오몽녀>는 1937년 1월20일 단성사에서 개봉됐다.

▲ 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그러나 무리한 행보로 나운규의 몸은 급속히 나빠졌고, 1937년 8월9일 향년 35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8월11일 <아리랑>이 개봉됐던 단성사에서 그의 영결식이 열렸다. 1962년 나운규 탄생 60주년 추도사에서 작가 오영진은 “진정 그가 없었다면 우리들의 지난날이 얼마나 삭막했을지 모를 일”이라고 했다. 암울한 식민지 상황에서도 조선 민중을 울고 웃게 만든 ‘천재 영화인’ 나운규의 위력을 느끼게 하는 말이다. 독립운동가에서 영화인으로 행로를 바꾼 나운규는 자신의 영화 속에 조선인의 애환과 더불어 독립에 대한 열망을 담고자 했다. 영화에 대한 혼신의 열정을 불사르다 36세의 나이로 요절, 한국 영화사의 신화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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