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낮기온이 30도를 웃돈 20일 건설노조가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폭염 시기 건설현장의 실태를 폭로하고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용접과 콘크리트 타설 등 폭염에 취약한 작업을 하는 노동자들이 평소 옷차림을 한 채 얼음 바구니를 뒤집어쓰는 상징의식을 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건설현장에서 30년 넘게 용접공으로 일한 ㄱ씨. 20일 오후 정부서울청사 앞에 선 그는 남색 모자를 덮어쓰고 용접 헬멧과 검은 보안경을 썼다. 목에는 용접 마스크를 걸고 있다. 연청색 가죽 자켓을 입고 같은 소재 글로브를 꼈다. 기온이 섭씨 32도를 넘긴 낮시간이었다.

“지금 입은 복장은 평소 일할 때 입는 옷들의 반의 반도 안 됩니다. 안전벨트도 있고 밑에도 똑같이 가죽 바지를 입어야 해요. 이 옷을 입고 일하다 보면 10분만 있어도 땀에 젖고, 하루만 입어도 다음날 못 입을 정도가 되는데요. 그럼에도 제대로 쉴 공간과 시간이 없습니다.” ㄱ씨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건설산업연맹 노동안전보건위원회가 연 ‘건설현장 폭염실태 폭로 및 촉구 기자회견’에서다.

건설노동자 10명 중 8명
“폭염이어도 별도 지시 없이 일했다”


최장기간 이어진 장마가 한풀 꺾이고 무더위가 시작되면서 건설현장 노동자들의 ‘쉴 권리’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지난 18일부터 이틀간 전국적으로 폭염 경보가 발령됐지만 노동자들은 제대로 쉴 시간도, 쉴 공간도 보장받지 못했다고 하소연한다. 연맹에 따르면 실제 지난 16일 대전의 한 학교 증축공사 현장에서 작업 중이던 노동자가 심근경색으로 숨졌다. 이날 최고 기온은 33.3도였다.

정부 대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6월 폭염에 노출되는 옥외작업 노동자를 위한 대책으로 폭염특보 발령시 시간당 10~15분씩 규칙적으로 휴식시간을 배치하고, 무더위 시간대(오후 2~5시) 옥외작업을 최소화하라고 지침을 내렸다. 시원하고 깨끗한 물과 작업자가 쉴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할 것도 지침에 담았다. 폭염주의보는 일 최고기온이 33도 이상인 상태가, 폭염경보는 35도 이상 상태가 2일 넘게 지속될 것으로 예상될 때 발령한다.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안전보건규칙)에도 사업주는 근로자가 고열 등의 작업을 하는 경우 휴식시간에 이용할 수 있는 휴게시설을 갖춰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지침과 규칙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 연맹이 지난 19일 건설노조 조합원 46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더니 ‘폭염특보 발령시 1시간 일하면 10~15분 이상씩 규칙적으로 쉬고 있다’는 항목에 응답자의 24.7%만 “그렇다”고 답했다. “재량껏 쉬고 있다”는 응답이 55.5%로 절반을 넘었다. “쉬지 않고 봄·가을처럼 일한다”는 답변은 19.7%나 됐다. ‘폭염 경보시 오후 2~5시 사이에 작업이 중단·단축된 적이 있냐’는 질문엔 16.9%만 긍정했다. 83.1%는 “폭염이어도 별도 지시 없이 일하고 있다”고 했다.

시원한 물은 88%가 제공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조차 제공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12%인 셈이다. 쉴 공간도 마땅치 않았다. 햇볕이 완전히 차단된 곳에서 쉰다는 응답은 41.4%로 절반도 안 됐다. 아무데서나 쉰다는 답이 38.6%였다. ‘쉴 만한 장소가 마련돼 있지 않다면 어디서 쉬는가’라는 주관식 질문에는 “아무데나” “그늘진 곳을 대충 찾아 쉰다” “콘크리트 친 곳 밑”과 같은 답변들이 이어졌다. 폭염기 세면장과 관련해서는 “씻을 데가 못 된다”는 응답이 42.3%로 가장 많았다. 실제 연맹은 건설노동자들이 건설 자재가 널부러진 곳에서 그대로 누워 쉬고 있는 사진을 공개했다. 연맹 관계자는 “큰 아파트 공사 현장의 경우 팀별로 컨테이너를 휴게공간으로 제공받기도 하지만 팀원 모두가 사용할 수 있을 만큼 크지 않다”며 “중소 공사현장에서는 그마저도 제공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현장 아무 곳에서나 쉬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 건설노동자들이 쉴 곳이 마땅찮아 건설 현장 그늘진 곳을 찾아 쉬고 있다. <건설산업연맹>

“적정 공사기간·공사비 산정돼야 제도 현실화”

연맹은 노동부 대책이 현실화하려면 이와 관련해 추가되는 비용을 발주처가 부담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령 폭염특보 발령시 쉬는 시간이 늘어나 임금이 줄어들면 노동자에게도 부담이기 때문이다. 폭염시 임금삭감 없는 노동시간단축을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비용을 발주처가 추가로 부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연맹은 “공공 공사의 경우 2018년부터 기획재정부가 악천후에 따른 공사기간 연장·예산확대를 실현하고 있다”며 “하지만 관련 규정이 없는 민간 현장은 현실화되기 어려운 상황에 있는 만큼 법·제도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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