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있는 최희숙 선생 흉상.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2020년은 광복 75주년이 되는 해다. 매년 8월15일이면 수많은 정치인들과 유력 인사들이 국립현충원을 찾는다. 조국광복을 위해 싸운 독립유공자들이 안장된 곳이기 때문이다. 북한에도 비슷한 곳이 있다. 평양직할시 대성구역 주작봉 아래 자리 잡은 혁명열사릉이 그곳이다.

알다시피 북한은 김일성 주석이 이끌었던 항일혁명의 정신과 역사, 기풍이 지배하는 나라다. 항일혁명투쟁은 그들의 긍지와 자부심의 뿌리이며, 사상과 정치, 문화의 원형질이다. 혁명열사릉에는 김일성 주석과 함께 싸웠던 동지들 160명이 모셔져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 모셔진 15명을 ‘15열사’라고 부른다. 이들 ‘15열사’에는 김책·최용건·최현·림춘추·김일·오백룡 등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인물들과 함께 두 명의 여성이 있다. 한 사람은 김일성 주석의 부인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어머니인 김정숙이고, 다른 한 명은 김정숙이 함께 항일투쟁을 하며 언니로 따랐던 최희숙이다.

김정숙과의 첫 만남과 생사를 넘나든 우정

최희숙은 1909년 12월16일 중국 연길현 세린하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고분이었다. 열일곱 살 되던 1926년 가난한 농가의 두 살 어린 총각 박원춘과 결혼했다. 1931년 부부는 함께 항일투쟁에 뛰어든다.

시댁이 있던 연길현 국자가 용암동 부녀회 책임자였던 최희숙이 조직의 부름을 받고 연길현 팔도구의 유격구인 석인촌에 들어간 것은 1932년 가을이었다. 여기서 최희숙은 김정숙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당시 최희숙은 스물세 살, 김정숙은 불과 열다섯 살이었다. 김정숙과 최희숙은 유격구에서 재봉대와 작식대(취사담당), 아동단 사업을 하면서 연길현 삼도만과 안도현 처창즈 근거지에서도 함께 생활했다.

두 사람은 1936년 봄 안도현 미혼진에서 동북항일연군 2군 3사에 들어갔고, 그해 7월에 3사가 6사로 개편되면서 최희숙은 재봉대 책임자가 되었다. 같은해 여름 김정숙과 최희숙 등 6사의 여전사들은 남만의 무송현성 전투에 참가했고, 8월 말에는 무송에서 되골령을 넘어 장백지대로 진출했다. 이들은 장백에서 9월 벌어진 대덕수·소덕수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 참가한 다음 백두산 최후방기지인 횡산밀영으로 들어가게 된다.

‘고난의 행군’과 전사의 자세

1938년 봄 부대는 압록강 일대에서 춘기공세를 전개하다가 장백지구에서 몽강으로 넘어갔고, 7월에는 몽강현 남패자에서 동북항일연군 1로군 2방면군으로 재편됐다. 그해 겨울에는 다시 몽강에서 장백으로 ‘고난의 행군’(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까지 김일성 부대가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리며 추위와 배고픔을 참아가며 유격전을 감행했던 시기)이 시작됐다.

눈보라는 살을 에고, 식량은 떨어지고, 깊이 쌓인 눈길은 발목을 붙들었다. 뒤에서는 적들이 쫓아오고 하늘에서는 비행기가 돌아치니 몸을 녹일 수도 없었고, 휴식을 취할 짬도 없었다. 운 좋게 장백현 어느 목재소에서 말을 몇 필 구했으나 날고기에 소금도 없어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때 최희숙은 가장 먼저 고기를 씹어 삼켰다. 무엇이라도 먹어야, 살아야 일제와 싸울 수 있고 조국의 광복도 볼 수 있으므로. 다른 전우들도 묵묵히 날고기를 씹어 넘겼다.

눈보라 만리, 혈전 만리에 풍찬노숙하면서 혹독한 추위와 식량난, 병마와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면서 적들과 끊임없이 추격전을 벌여야 했던 고난의 행군. 하지만 최희숙은 남성전사들과 똑같이 싸우고 일하면서도 한밤중까지 동지들의 옷과 신발을 꿰맸고, 모든 일을 끝내고서야 쪽잠이 들었다. 동료 전사들이 ‘언니, 누나’ 하며 따른 것이 결코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1939년 5월18일, 마침내 부대는 장백을 통해 압록강을 건넜다. 국내진공작전에 성공한 것이다. 중국에서 태어난 최희숙도 처음으로 조국 땅을 밟는 감격을 누렸다. 그날 최희숙의 심정이 어땠을지…. 부대는 무산지구 대홍단전투를 비롯한 국내진공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다음 두만강 상류를 통해 다시 중국 관내로 넘어갔다. 6월 초에는 올기강전투에서 위만정안군 1개 연대를 소탕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 광복 75주년을 맞아 지난 15일 수구집단이 개최한 집회에 등장한 성조기와 일장기. 광복을 기념하는 날 식민지 종주국 깃발을 들고나온 발상이 놀랍다. 이 한 장의 사진이 한국수구의 정신적 뿌리와 배후세력 그리고 그들의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유튜브 캡처>

부상과 체포 그리고 장렬한 최후

1939년 늦가을 재봉대는 사령부로부터 한 달 내로 겨울군복 600벌을 만들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10여명의 여성전사들만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였지만 최희숙은 두말 않고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염색·재단·재봉 등으로 조를 짜서 밤낮없이 전투에 매달렸다. 마침내 그들은 불과 20일 만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다.

재봉대원들의 임무완수가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던지 당시 2방면군 사령관이었던 김일성 주석은 최희숙에게 금반지와 시계를 선물로 주었다. 부대에서는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해 주고 싶었겠지만 정작 당사자는 혼자서 이런 선물을 받는 것이 송구하다며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1940년 홍기하전투에서 전과를 올린 2방면군은 다른 항일연군 부대들과 마찬가지로 소부대 활동을 전개하다가 소련 경내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때 최희숙은 남창수가 이끄는 소부대에 소속돼 화룡현 오도양차 밀림에서 겨울을 나게 됐다.

1941년 2월께 이들은 사령부를 찾아 중·소 국경을 향해 동쪽으로 이동하려 했으나 일본군의 토벌작전으로 커다란 위기에 봉착했다. 동이 난 식량을 구하기 위해 한 농가에 들어갔던 그들을 어떻게 알았는지 토벌군이 출동했다. 소부대가 토벌군을 피해 산속으로 급히 숨었으나 이미 적들에게 포위된 다음이었다.

“투항하라”는 적들의 말에 총알로 대답한 소부대였으나 중과부적. 먼저 남창수가 총에 맞았고, 다음으로 최희숙도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동지들은 적들의 말을 빼앗아 남창수를 급히 도피시켰고, 최희숙은 동지들이 들쳐 업고 적들의 총탄을 피해 산길을 내달았다.

포위망은 점점 좁혀들었다. “나를 내려 달라. 그러지 않으면 모두가 죽고 만다. 동지들은 사령부를 찾아가야 할 것 아니냐”는 최희숙의 피어린 호소에도 누구 하나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좌우에서 들이닥친 적들과 교전이 벌어졌다. 전투를 할 수 없어 바위 밑에 피해 있던 그에게 토벌군이 다가왔다. 생사의 기로에서 전투를 벌이던 동지들은 그가 잡혀가는지도 몰랐다.

토벌대에 끌려간 그는 온몸에서 피가 빠진 상태에서 온갖 모욕과 고문을 당했지만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협박과 고문이 통하지 않자 일제는 김재범이라는 전향자를 내세워 회유하려 했으나 돌아온 것은 “비루한 반역자야, 빨리 물러가라! 진짜 공산당원(당시는 국제당의 일국일당제 원칙에 따라 중국 관내에서 활동하는 조선 혁명가들은 모두 중국공산당에 가입해야 했다)은 백번 죽어도 적에게 굴복하지 않는다!”는 준열한 질타뿐이었다.

비록 나에게 눈이 없을지라도

어떤 회유도, 고문도 통하지 않자 독이 오른 일제는 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차마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최희숙의 두 눈알을 뽑아 버린 것이다. 그 순간 최희숙은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나에게는 지금 두 눈이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 이천만 겨레가 만세를 부르며 광복을 알리는 그날이 보인다.”

이렇게 외친 그는 마치 해방된 조국 땅에서 동포들과 만세를 부르고 있는 듯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마지막 심장의 고동을 멈췄다.

북한에서는 그의 신념과 의지를 기려 혁명열사릉에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함경북도 함흥시 덕성동에 있던 함흥제1교원대학을 1997년 2월 그의 이름을 따서 최희숙함흥제1교원대학으로 개칭하게 했다.

중국 연변의 재중동포들도 해마다 항일전쟁승리기념일이면 각종 공연이나 기념식에서 최희숙의 일대기를 그린 방송극 <승리가 보인다>의 주제곡 <그대들은 생각해 보았는가!>라는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이처럼 북한과 중국에서 최희숙은 일본제국주의 강도를 몰아내고 조국에 광복을 안겨 준 항일투사로 존경받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남쪽 사람들이 최희숙을 모르는 이유가 이데올로기 때문이라면 이 얼마나 슬프고 부끄러운 일인가.

2005년 8월14일 김기남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과 6.15북측위 위원장 등 북측 민간·당국 대표단 32명이 현충원 현충탑을 참배했다. 광복과 분단 60년 만에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광복과 분단 75년이 되는 오늘까지 북쪽의 혁명열사릉을 공식적으로 참배한 남쪽의 당국자와 민간인은 한 사람도 없다.

정용일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광복 75주년을 맞아 통절한 마음으로 돌아봐야 한다. 과연 대한민국이 자주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온전히 갖추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축제의 자리가 돼야 할 광복절에 이렇게 절규한다.

“친일반역자가 작곡한 노래를 애국가로 부르는 나라, 화폐 속에 독립운동가가 없는 나라, 국립현충원에 민족반역자들이 안장된 나라, 친일반민족세력이 분단에 기생하며 민족 자주적 역량 결집을 방해하는 나라, 친일민족반역자들을 청산하지 못한 나라, 친일을 미화하는 자들을 보수라고 부르는 나라….” 그리고 이렇게 끝을 맺었다.

“대한민국을 광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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