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이 땅에 형식적 민주주의를 뿌리내린 87년 6월 항쟁이 끝난 지 30년도 넘었다. 그런데도 노동법의 기초인 근로기준법도 온전하게 적용받지 못하는 5명 미만 사업장 노동자가 580만명에 달한다. 여기에 220만명 넘는 특수고용직과 임시직 노동자까지 치면 2천만 노동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저임금·장시간·무권리 상태다.

한국은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시작한 지 반세기 만에 세계 7번째로 ‘3050클럽’에 가입했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3만 달러 이상이면서 인구가 5천만명 이상인 명실상부한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이런 나라에서 절반의 노동자가 노조가입조차 못한 채 살아간다. 한국이 선진국이 된 비결은 이처럼 ‘노동 후진국’이라서다. 자살률 1위, 산업재해 1위에, 출산율은 뒤에서 1위인 게 다 이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은 한국의 1천만 ‘그림자 노동’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자본 선진국이면서 동시에 노동 후진국인 이 구조적 모순을 성찰하지 않고선 이 땅에 미래는 없다. 1천만명의 불안정 노동을 문명사적 위기로 받아들이지 않고선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다.

국가와 자본은 입만 열었다 하면 4차 산업혁명으로 위기를 돌파하자지만 80년대 이후 오늘까지 3차 산업혁명이 가져온 파국을 보면 이마저도 쉽지 않다. 산업혁명은 격차를 줄이기는커녕 늘 벌려 왔다. 격차사회의 주범인 자본은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지지 않을 것이다.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어선 지 1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전체 가구의 40% 이상이 무주택자다. 그런데도 정부는 공급 확대책을 내놓고, 자본은 건설기술 혁신을 말한다. 자본에 책임을 물어야 할 국가는 오히려 조삼모사의 술수만 부린다.

코로나19 팬데믹에서 노동자 대다수는 각자와 가족의 생존을 책임지기도 버겁다. 바로 이 시기에 문화예술가들이 권리를 잃어버린 이 땅 1천만 노동자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름하여 ‘아름다운 삶을 권유하다 展(전)’이다. 문화연대와 권리찾기유니온 권유하다는 21일부터 다음달 2일까지 서울 종로구 효자로 21 인디프레스 갤러리에서 후원전시회를 연다. 주재환·신학철·김정헌·민정기·임옥상·이종구·박불똥 등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던 24명의 거장이 작품을 내놨다.

권유하다는 권리를 박탈당한 1천만 노동자를 모으려고 지난해 10월9일 출범했다. 경향신문은 권유하다가 지난 2월5일 온라인 플랫폼 ‘권리찾기 유니온’을 개통하자 다음 날 논설위원 고정칼럼 ‘여적’에 “낮은 곳을 주시하는 ‘권유하다’, 참 이름 잘 정했다”고 상찬했다. 59년 이승만 독재정권의 발악에 온몸으로 저항하며 신문사 폐간까지 불렀던 유서 깊은 ‘여적’이란 지면이어서 더 고마웠다.

노동과 예술이 서로를 백안시하는 관행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분리해 온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서로의 외면은 영혼 없는 노동과 추상을 떠도는 실체 없는 예술로 분리돼 공동체의 분열을 강화하고 자본과 국가에 독주의 기회만 더 베풀 뿐이다. 예술은 잠수함 속 토끼와 같다. 예술은 사치품이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삶과 영혼의 건강을 위한 필수품이다.

가장 많은 시간을, 가장 힘든 일을, 가장 적은 임금으로 수행하는 무권리 노동자야말로 오늘 이 세계를 아직도 굴러가게 만드는 유일한 동력이다. ‘권유하다 전’은 이런 무권리 노동자의 권리를 담보로 쌓아 올린 탐욕의 바벨탑을 무너뜨리기 위해선 노동과 예술이 서로의 책임을 깊이 각성하고, 그 속에서 창조적 연대로 시대의 부름에 답해야 한다고 말한다. ‘권유하다 전’이 늦여름 청와대 앞 1인 시위나 기자회견 가는 비정규 노동자의 방문을 기다린다. 정부청사 창성동별관 아래 인디프레스에서.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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