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훈 여행작가

북섬의 한가운데 어디쯤 위치한 로토루아는 오클랜드에서 차로 3시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곳이다. 24만년 전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거대한 칼데라 호수인 로토루아 호수는 남섬에서 보는 빙하 호수들과는 때깔부터가 다르다. 남섬의 호수들은 빙하가 돌바닥을 깎아내면서 만든 밝고 묵직한 회색으로 밀키한 색인데, 화산 폭발이 만든 커다란 구덩이를 비와 강이 채운 로토루아는 그냥 한없이 푸르다.

울창한 숲을 지나 ‘레이크 로드’를 따라 차를 몰면 바다라도 되는 듯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호수가 나타난다. 물어볼 것도 없이 이곳이 바로 화산 마을 ‘로토루아’다. 몰고 온 캠핑카를 숙소에 주차하고, 담 너머 보이는 특별할 것 없는 동네 공원부터 찾는다. 공원 입구를 지나자마자 콧구멍이 먼저 여기가 ‘찐’ 화산지대라는 걸 알아챈다. 여기저기서 ‘구리구리한’ 썩은 달걀 냄새가 콧속으로 밀려들어 왔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유황 냄새다. 동네 한가운데 있는 흔한 공원에서 웬 유황냄새일까 황당하기도 한데, 공원 안으로 들어가면 황당함은 더해진다. 유황 냄새에 더해서 매캐하게 피어오르는 연기와 부글부글 거품을 내며 끓고 있는 진흙(머드) 구덩이들이 공원 여기저기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여기까지는 로토루아를 찾은 이들을 위한 무료 맛보기 코스에 불과하다.

살아 있는 화산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다면 화산 체험 테마파크인 ‘와이오타푸’나 ‘헬스게이트’를 찾아가야 한다. 여기서부터는 물론 유료 코스다. 하지만 자본주의 화산 맛은 가성비가 있다. 각양각색의 화산 못(pool)들이 유황냄새와 연기를 피우며 여행자들을 맞는다. 보글보글 거품을 밀어 올리는 ‘샴페인 풀’도, 화려한 색깔을 뽐내는 ‘예술가의 팔레트’도 놓치지 말아야 할 구경거리다. 연기를 타고 오르던 유황이 굳어져서 생긴 화산꽃과 유황의 독기를 못 이겨 내고 누렇게 떠 버린 나뭇가지들도 화산지대의 지옥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데 한몫한다. 유황 냄새를 너무 오래 맡아서 정신이 살짝 오락가락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로토루아 화산지대 테마여행의 절정인 ‘간헐천’ 구경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름 그대로 간헐적으로 솟구쳐 오르는 뜨거운 화산수는 신기하기도 하지만 뭔가 막혔던 응어리가 함께 터지는 듯한 시원함도 함께 가져다 준다. 간헐천을 특화한 테마파크 ‘테푸이아’의 힘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뉴질랜드도 자본의 손길이 닿으면서 조금씩 변화가 쌓여 가고 있었다. 예전에는 후미진 길을 찾아 들어가 간헐천 하나 겨우 보고 나오는 게 다였는데, 요즘은 이렇게 테마파크로까지 꾸며 놓았다. 세련되게 변해 가는 것을 마다할 일도 아니고, 그 편리함은 역시 중독성이 있다. 그래도 뭔가 두근거리며 찾아가 모험을 즐긴다는 느낌이 강렬했던 예전의 기억이 사라지는 건 역시 아쉽다. 이래서 다들 나이를 먹으면 ‘라떼는 말이야~’를 외치고 살게 되나 보다.

이제 마무리 코스만 남았다. 드넓은 로토루아 호수를 바라보며 즐기는 유황온천 힐링이 오늘의 디저트다. 호숫가에 위치한 폴리네시안 스파에서 조금 돈을 더 써서 프라이빗한 온천을 이용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디든 유황끼 가득한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갈매기와 함께 호수를 바라보는 특별한 경험은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한참을 유황수에 몸을 담갔다 나오면 사라졌던 젊음이 다시 돌아온 듯 뽀득뽀득해진 피부에 깜짝 놀랄 수도 있다. 뭐 아주 잠깐이겠지만 회춘의 기쁨을 느껴 보는 게 정신 건강에는 좋을 수도 있다. 물론 효과가 다음날까지 간다는 보장은 없지만.

로토루아를 떠나기 전에 한 가지를 더해 볼 게 없냐고 누가 묻는다면, 앞뒤 잴 것 없이 레드우드 삼림욕장에서 캐노피 워킹을 즐겨 보라고 권하고 싶다. 캐노피 워킹은 높이 솟은 나무들 위쪽을 이어서 만든 공중 산책로를 따라 즐기는 삼림욕을 말한다. 10미터는 족히 되는 높이에서 숲을 걸어 볼 수 있다는 건 아주 특별하다. 뭔가 타잔이나 침팬지가 된 느낌이 들기도 하고. 그런데 원고를 쓰려고 레드우드 삼림욕장을 다시 찾아보다가 엄청난 걸 발견하고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라떼는 말이야. 생각도 못해 봤던 일이라고’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충격. 이런! 맙소사! 야간 캐노피 워크가 생겼다니!

은은한 조명 속에서 삼림욕을 즐기는 것도 부러운데, 쏟아지는 별빛까지 온몸으로 받을 수 있는 밤 숲에서의 공중부양 산책이라니! 이럴 땐 진짜 ‘라떼는~’이 억울하다. 좀 더 늦게 태어나서 이런 호사를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겪어 봤어야 하는데 말이다. 코로나19가 좀 잠잠해지면 꼭 다시 뉴질랜드 북섬을 찾으리라 다짐한다. 로토루아의 어느 여름밤, 울창한 숲속의 나무 위를 걸어 다니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여행작가 (ecoc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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