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 시인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어 중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게 무척 많다는 건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그중 상당수는 이미 우리말과 문화 속에 너무 깊숙이 들어와서 달리 바꿔 쓸 수 없는 것들이다. 일본식 한자어를 몰아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일부 동의하는 면도 있지만 지나치게 언어 순혈주의를 내세우는 것에는 찬동하지 않는다. 한 나라의 언어는 대체로 다른 언어와 섞이거나 영향을 받으면서 발전하기 마련이다. 오지에 고립돼 있는 부족의 언어가 아니라면 그런 영향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외부에서 들어온 말을 얼마나 우리 현실과 상황에 맞게 적용해서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 국어사전에 일본에서 들어온 한자어를 무분별하게 싣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쓰임새도 거의 없으면서 혼란만 부추기는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낱말이 그렇다.

전선병(傳線病) : 여자의 긴 양말이 세로로 올이 풀리는 일.

양말의 올이 꼭 세로로만 풀릴까? 가로로 풀리는 경우에는 무어라고 이를까? 이런 의문점도 가질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올이 풀리는 걸 병(病)이라고 하는 게 더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찾아보니 역시 일본 사람이 만든 말이었다.

でんせんびょう(傳線病) : <속어> 여자 스타킹 따위의 올이 줄줄이 풀리는 일.

아무리 생각해도 실려야 할 이유가 없는 낱말이다. 병(病)과 관련된 낱말 두 개를 더 보자.

일기병(一期病) : 일생 동안 낫지 아니하는 병.

이 말 역시 우리는 안 쓰는 말로, 일본어사전에 나온다.

いちごやまい(一期病) : 고치지 못하는 병, 죽을병.

같은 뜻을 가진 한자어로 우리는 예전에 종신병(終身病)이나 종신지질(終身之疾)이라는 말을 썼다. 요즘은 흔히 불치병(不治病)이라는 말을 쓰고 있으며, 순우리말로는 ‘죽을병’이라는 말이 표제어로 올라 있기도 하다.

학교병(學校病) : <의학> 주로 학생들 사이에 많이 생기거나 전염하는 병. 근시안, 머릿골 신경 쇠약, 척주 만곡, 폐결핵, 유행성 감기 따위가 있다.

이 말은 일본에서 만든 학교보건법(學校保健法)에 나오는 용어다. 의학에 관한 일본 법률 용어까지 우리 국어사전에 실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우리가 저 용어를 받아들여 활발히 써 왔다면 모르지만, 교사 중에 저런 용어를 사용하거나 들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혈우병(血友病) : <의학> 조그만 상처에도 쉽게 피가 나고, 잘 멎지 아니하는 유전병. 여자에 의하여 유전되어 남자에게 나타나는 병이다.

한자를 잘 보면 ‘벗 우(友)’가 들어 있다. 병의 증상과 연결지어 생각할 때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용어다. 일본의 히로다 츠카사(弘田長)가 ‘hemophilia’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hemo’는 피, ‘philia’는 ‘사랑하다’의 뜻으로 직역하다 보니 우리 관념에는 맞지 않는 용어가 탄생했다. 서양 사람이 처음 이 병을 발견했을 때, 보통 사람은 피를 싫어해서 피가 나도 금방 굳어 버리지만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피를 좋아해서 계속 흐르도록 둔다는, 어이없을 정도로 비과학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한 번 생긴 말은 쉽게 버리거나 고치기 힘들다. 말 만들기의 적실성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많은 사람의 입과 귀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혈우병과 같은 낱말까지 버리거나 다른 말로 바꾸자고 할 생각은 없다. 다만 앞서 소개한 전선병·일기병·학교병 같은 낱말들은 우리 사회 안에서 제대로 받아들여진 적이 없거니와 굳이 끌어와서 사용해야 할 필요성도 없기에 국어사전 목록에서 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일환 시인 (pih6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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