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이동광 선생. 초상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동광(李東光)은 이름이 비슷한 이홍광과 같은 시기, 같은 지역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앞서 이홍광을 남만주에서 최초로 무장대오를 일군 지도자로, 항일 무장투쟁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불세출의 영웅으로 소개한 바 있다. 이동광 역시 그에 못지않은 인물로서 이홍광과 더불어 남만주 항일운동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며 오늘의 중국에서도 걸출한 조선족 혁명열사로 추앙하고 있다.

동흥중학에서의 학생운동

1904년 함경북도 경원군 중농의 가정에서 태어난 그의 원래 이름은 이상준(李相俊)이다. 장세현·이동일로도 불렸다. 1918년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제의 잔혹한 식민통치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부모가 전 가족을 이끌고 만주 길림성 훈춘현 대황구로 이주했다. 1922년 용정의 동흥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용정은 민족운동의 메카라고 할 정도로 독립운동의 열기가 넘쳐 나는 곳이었다. 학교 내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부하는 모임인 사회과학연구회와 독서회가 만들어지자 이동광은 여기에 참여해 공산주의 사상을 학습하고 받아들였다. 동흥중학은 1921년 천도교에서 설립한 학교로 처음에는 마르크스주의 학습을 반대해 학생들을 제적하는 등 제재를 했다. 여기에 맞서 이동광은 1923년 말 학생들을 조직해 ‘교육과 종교의 분리’ ‘경문폐지’ ‘모든 서적 섭렵과 사회활동의 자유’ 등을 내걸고 동맹 휴학에 들어갔다, 학교측은 학생들의 압력에 굴복해 학생들이 제기한 요구를 받아들였고 학생들의 투쟁은 승리로 마무리됐다. 이후 동흥중학은 진보사상을 전파하는 중요한 진원지가 됐다.

이동광은 “제국주의와 봉건주의 세력을 무너뜨리려면 학생의 힘만으로는 안 되고 무산자와 각 민족의 민중과 함께 싸워야 승산이 있다”고 말하며 휴일과 방학을 이용해 공장과 농촌으로 들어가 혁명사상을 전파했다. 동흥중학을 졸업한 해인 1925년 훈춘 대황구로 가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우리 민족의 독립과 근로민중의 해방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반제 반봉건 투쟁에 나서야 한다며 혁명사상을 널리 선전했다. 이듬해인 1926년 겨울 다시 용정으로 온 이동광은 동흥중학교 직원으로 일하게 되자 학생운동을 지원하며 청년운동의 핵심적 위치에 섰다. 1927년 5월1일 메이데이 때는 동흥중학과 대성중학을 중심으로 수천 명의 학생과 민중들을 선두에서 이끌고 용정 일본영사관 앞에서 “일본 제국주의 타도!” 구호를 외치며 시위했다. 이러한 이동광의 활동은 일본영사관측에 감지돼 요주의 인물이 됐고 1차 간도 공산당 사건 때 체포돼 감옥에 갇혔다.

활동 무대를 남만주로 옮기다

친구의 도움으로 용정 감옥에서 탈출에 성공한 이동광은 그해 10월 동만을 떠나 당시 혁명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남만주 반석현으로 갔다. 반석 모범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수업시간에도 혁명사상을 가르쳤으며 휴일에는 농촌에 들어가 가난한 조선 농민들의 친구가 돼서 야학을 운영하며 혁명사상을 전파했다. 이러한 이동광의 활동은 중국공산당 당원들의 눈에 띄게 됐다. 1928년 여름부터 공산당과 접촉하기 시작해 1929년 겨울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반석현 초기 중공 당원의 한 명이 됐다. 이동광은 1930년 8월 공산당 반석현 반동구 서기를 맡았으며 농민협회, 부녀회, 아동단 등 대중조직을 만들어 나갔다. 1930년 가을부터 1931년 상반기까지 반동구 농민들을 이끌고 조세저항과 식량분배투쟁을 했다.

1931년 9·18 사변 후에는 이홍광을 도와 노농적위대를 조직했으며 이 무장대오는 이후 동북항일연군 1군으로 발전했다. 1932년 4월에는 역시 이홍광과 함께 반석 노농의용군을 창건했으며 창건 후 두 달 사이에 여섯 차례의 쌀 빼앗기 투쟁을 하며 반동지주 3명을 처단하고 지주들의 무장대오를 격파하고 많은 무기를 노획함으로써 항일 무장대오의 위력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이에 놀란 적들은 1933년 봄 항일 무장대오를 토벌하기 위해 나섰는데 이홍광·양정우와 함께 여기저기 전전하며 적들의 네 차례나 되는 대규모 토벌작전을 분쇄했고 홍석랍자를 중심으로 유격근거지를 창립하는 등 오히려 역량이 강화됐으며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안겨 줬다.

남만 항일무장투쟁의 핵심이 되다

1933년 5월7일 열린 반석현·중심현위원회에서 이동광은 중심현위원회 서기로 선출되자 적의 토벌에 무너진 당 조직과 항일 군중단체를 회복하고 발전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1년여의 노력 끝에 1934년 8월 반석현·중심현위는 4개 구위와 2개 특지, 3개 직할 지부를 복원하거나 재건해 당원이 2배 가까이 늘어났다.

같은해 7월1일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동북인민혁명군 창설 결정에 따라 인민혁명군 관련 조례 제정, 규칙·선언문 작성에 관여하는 등 준비작업에 참여했다. 1933년 9월18일, 9·18 사변 두 돌을 맞아 동북인민혁명군 1군 독립사를 창건했으며 양정우가 사장 겸 정치위원을 맡았다. 이동광이 이끄는 반석현·중심현위는 항일신문을 창간해 혁명군의 성격과 취지를 소개하는 등 1군 독립사단을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34년 11월5일 중공 남만지구 1차 대표대회가 임강현 4도구에서 열렸는데 중공당 남만 임시특위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이동광은 특위 서기로 선출됐다. 이 회의에서 이동광은 반석현·중심현위를 대표해 사업보고를 했다. 또 1군 독립사단을 동북인민혁명군 1군으로 개편하기로 하고 양정우를 군단장 겸 정위로 선출했다. 이로써 이동광과 양정우는 남만 당 조직과 군대를 책임지는 위치에 서게 됐다. 반석현은 남만주 항일투쟁의 핵심 거점으로 성장했는데 당시 당 조직의 지도하에 반석현 각지에 477개의 농민자위대를 설치했으며 반석 반일회는 17개 지회와 224개 분회에 회원만 3천400명에 달했다. 일제는 길림성이 만주 치안의 암 덩어리고 반석현은 길림성 치안의 ‘암 중의 암’이라고 할 정도였다.

일제는 일본군 1만명을 동원해 1934년 겨울부터 동계 토벌을 시작해 1935년 봄까지 진행했다. 세 번째 남만 토벌 직전이었다. 이동광은 남만의 군민들에게 적들의 포위토벌에 맞서 싸울 것을 호소했다. 이동광의 목에는 10만원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이동광은 아랑곳하지 않고 1935년 7월부터 10월까지 약장사로 변장해 림강·금천·류하 등지로 직접 내려가 지도사업을 했고 적들의 포위토벌도 순조롭게 물리쳤다. 1935년 10월까지 남만의 56개 지방에서 인민정부를 세우는 등 각지의 항일 역량은 강화됐다.

1936년 봄 동북인민혁명군과 각 항일무장부대는 동북항일연합군으로 재편성됐다. 1936년 여름부터 1937년 6월까지 이동광은 1군과 함께 관전·환인·신빈·집안 등 여러 현들에서 활동하면서 전투를 지휘해 승리를 거뒀다. 일본침략자들은 1936년 6월부터 위만군을 주력으로 토벌을 감행했는데 동원된 병력은 1만6천여명이다. 이동광은 양정우와 합작해 유격전을 벌여 매복유인전술로 적들의 이 포위토벌을 분쇄했다.

조국광복회의 발기인이 되다

이동광은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방침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적을 두고 항일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조선의 독립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코민테른은 식민지 피압박민족의 해방투쟁을 지지하고 반파시즘 통일전선 결성 방침을 내렸는데 중국공산당 정책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기실 만주의 중국공산당과 동북항일연군 전사들 대다수는 조선인 출신이었다. 이에 따라 1936년 초부터 동북항일연군이 조직되고 통일전선체를 표방한 조국광복회가 결성됐다. 조국광복회는 동만에서 먼저 결성되고 남만에서는 1936년 6월10일 오성륜(전광)·엄수명·이상준(이동광) 세 사람의 발기인 명의로 ‘재만 한인 조국광복회 선언’을 발표했다. 선언은 “전 민족의 계급·성별·지위·당파·연령·종교 등의 차별을 불문하고 백의동포는 반드시 일치단결 궐기해 원수인 왜놈들과 싸워 조국을 광복시킬 것”을 밝히며 광범한 항일민중의 참여를 촉구했다. 선언 외에도 “광범위한 통일전선을 실현함으로써 일제의 통치를 전복하고 진정한 한인의 인민정부를 세울 것, 한인의 참다운 자치를 실현할 것,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울 수 있는 혁명적 군대를 조직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재만 한인 조국광복회 목전 10대 강령’도 발표했다.
 

노세극 4·16 안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영웅의 최후

이렇게 대중의 신뢰를 한 몸에 받으며 활동반경을 광범하게 넓혀 나가는 이동광은 뜻하지 않게 죽음을 맞이했다. 1937년 6월 일본군의 군용 열차를 습격하는 임무를 맡고 신빈현 영릉 부근의 황토강을 지나다가 몇 배에 달하는 적의 수비대와 맞닥뜨리게 됐다. 이 전투에서 항일연군은 승리했지만 이동광은 싸움을 지휘하다가 적의 흉탄에 맞아 희생됐다. 그의 나이 3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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