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원포인트 노사정 대화 합의안이 부결됐다. 김명환 집행부는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합의안은 그 성격이 정부가 이전부터 계획했던 것을 보완하는 것에 불과했던지라, 민주노총이 있든 없든 추진돼 갈 것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원포인트 노사정 대화를 둘러싼 논란이 일단락됐다.

하지만 남은 쟁점이 여전히 있다. 이번 논란에서 ‘노동조합총연맹’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두고 극단적 두 견해가 대립했기 때문이다. 이는 앞으로도 민주노총에서 쟁점이 될 수밖에 없다.

우선, 한쪽은 총연맹을 노사정 교섭의 노동측 대표라고 규정했다. 서유럽에서는 보통 산별노조가 임금·고용 관련 교섭을 담당하고, 산별노조들의 연합인 총연맹이 노동시장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제도개혁에 관해 사회적 대화를 한다. 한편 다른 쪽은 총연맹을 상시적 공동투쟁을 위한 조직이라고 규정했다. 민주노총은 투쟁하는 노조들을 대표하는 조직이지, 교섭이나 합의를 하라고 만든 조직이 아니란 것이다. 이들은 사회적 대화 또는 노사정 교섭을 ‘사회적 합의주의’라고 비판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두 주장 모두 타당한 점이 있다. 한국에서 사회적 합의 또는 계급적 타협이 만들어질 수 있는 조건이 취약하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당장 계급적 타협은 고사하고, 같은 계급 내에서도 각자도생이 만연해 있는 것이 한국 사회 현실이다.

예로 민주정에서 사회적 합의를 만드는 전통적 제도는 의회인데, 20대 국회는 4년 내내 식물상태였고, 21대 국회는 거대 여당의 일방통행과 청와대의 통법부로 전락한 상태다. 국회조차 못하는 합의를 노사정 대화기구에서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니, 사실 민망할 노릇이다. 자본가들도 ‘총자본’의 합의를 만드는 데는 무기력하다. 소수 재벌과 다수의 종속적 하청기업, 그리고 600만명 넘는 자영업자가 뒤섞여 있는 곳이 바로 한국의 자본가 세계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기대할 수 없는 재벌에게 사회적 합의의 리더십을 바랄 수는 없다. 노동자계급의 사정도 다르지는 않다. 세계 최고 수준의 임금 격차로 인해 서로가 같은 노동자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인천국제공항 정규직화 논란만 봐도 노동자 사이에 어떤 합의가 가능한지 회의가 들 수밖에 없다.

이런 상태에서 누가 계급을 대표할 수 있고, 또 무슨 합의를 만들 수 있겠는가. ‘사회’ 자체가 제대로 구성되지 않는 것이 한국의 현 상태이니, 합의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라 하겠다.

더욱이 역사적으로 사회적 합의는 배신의 역사였다는 점도 주의해야 한다. 95~96년 문민정부(김영삼)는 민주노총을 대화의 상대방으로 인정해 노사관계 개혁에 관한 협의를 진행한 바 있다. 하지만 민주노총에 되돌아온 것은 96년 12월의 정리해고 날치기였다. 98년 국민의정부(김대중)는 출범과 동시에 국가부도를 협박하며 정리해고 노사정 합의를 강요했다. 참여정부(노무현)와 민주노총의 관계는 화물연대와 철도노조 파업으로 시작해, 한미자유무역협정(FTA) 갈등으로 끝났다. 문민·국민·참여를 앞세운 정부들에서 민주노총은 이렇게 이용당하거나 매도당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노동존중’이란 거창한 말을 꺼냈지만, 왜 지난 25년간 노사정 교섭이 불가능했는지 근본적으로 평가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번 노사정 대화만 봐도 그러했다. 노사정 대화는 정부의 액세서리 정도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한국노동운동에서 공동투쟁이 대체로 기업별 투쟁으로 제한돼 있으며, 그 효과 역시 기업별 성과에 그친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원포인트 노사정 합의문을 비난했던 비정규직 투쟁단위만 봐도 비정규직 관련 제도나 노동시장의 전반적 변화가 아니라 사업장에서의 고용 문제로 싸우고 있다. 사실 기업별 노조 질서에서 공동투쟁은 계급적 투쟁이라기보다는, 더 절박한 노동자를 덜 절박한 노동자가 돕는 것이다.

2016년 발간된 ‘민주노총 20년 연표’를 보면, 민주노총의 대표적 투쟁은 96~97년 총파업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기업별 노조 투쟁을 지원한 것들이었다. 현대차·대우차·쌍용차·발전·철도 등의 구조조정 저지 투쟁부터 10여개에 이르는 고강도 비정규직 투쟁에 이르기까지, 민주노총을 대표하는 공동투쟁은 대부분 대기업과 공공부문의 정규직·비정규직 노조 투쟁이었다. 이런 투쟁이 정당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민주노총의 대표적 투쟁이 이런 식이라면 곤란하다. 모든 노동자를 대표한다는 민주노총이 사회적 파장이 큰 대기업 공공부문 투쟁에 자원 대부분을 사용하는 것이 되니 말이다. 모든 노동자의 ‘노동조합총연맹’에 한참 미달하는 것이다.

민주노총을 공동투쟁의 조직, 다시 말하면 사회적 파장력을 가지는 기업별 노조의 지원부대로 규정하는 것은 노동시장 양극화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양극화된 노동시장에서는 투쟁조차 양극화돼 있기 때문이다. 투쟁을 통해 쟁취할 것이 있는 노동자에게만 유리한 것이 결사항전식 기업별 투쟁이다.

정리해 보자. 사회적 대화는 조건이 갖춰지지 않아 현실성이 없고, 공동투쟁은 노동자계급의 단결이나 노동시장 격차 완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 관성일 뿐이다. 즉 민주노총 앞에 놓인 것은 비현실적 희망과 퇴행적 현실이라는 막다른 두 갈래 길이란 것이다. 이것이 민주노총이 두고두고 해결해야 할 쟁점이다.

문제 해결은 그 문제를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필자는 민주노총이 25년간 비슷한 문제를 두고 반복해서 실패했던 이유가 “문제를 직시하는 능력”이 부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김명환 집행부가 물러난 이후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는 무엇이 문제였는지도 정리하지 못하면서, 25년간 반복된 뻔한 투쟁구호를 외치려고 하는 것 같다. 사실 노사정 대화에서 풀지 못한 해고금지를 총력투쟁으로 쟁취할 수 있다고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다. 몇 개월 후 총연맹 집행부 선거가 있는데, 비대위가 투쟁을 조직할 리더십을 가질 수도 없다. 면피성 투쟁구호가 아니라 ‘왜’ ‘어떻게’ 원포인트 노사정 대화가 망가졌는지부터 평가했으면 한다. 민주노총 비대위가 무엇보다 먼저 직시해야 하는 것은 “대체 노동조합총연맹은 무엇을 하는 조직인가”에 대해 조합원 사이 합의가 없다는 불편한 진실이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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