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경 공인노무사(돌꽃노동법률사무소 대표)

공교롭게도 문제의 ‘행정종결’ 통보문을 받은 날은 청주방송 고 이재학 PD 사망 사건에 대한 4자 대표 간 최종 합의가 이뤄진 날이었다. 14년간 한 지역 방송국에서 정규직 노동자와 똑같이, 아니 더 많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노동자’가 아닌 ‘프리랜서’로 불렸던 고인은 이날 합의로 비로소 청주방송 정규직 사원이자 법의 보호를 받는 ‘노동자’가 됐다.

고인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청주방송 비정규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꾸려졌던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으로 막 활동을 시작하기 전, 지상파 방송사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다 퇴사한 한 노동자가 필자의 사무실을 찾았다.

본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아야 할 노동자였지만 ‘프리랜서 계약서’를 작성했고, 그러다 퇴사했는데 퇴직금을 받고 싶다고 했다. 고용노동부가 방송국 프리랜서의 노동자성에 대해 얼마나 형식적이고 보수적인 판단을 내려 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소송을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용과 시간이 부담스럽다는 진정인의 입장과 ‘이 정도 근로조건이면 진정도 넣어 볼 만하다’는 판단이 합쳐져 노동부에 진정서를 접수했다.

그리고 무려 6개월의 시간이 흘러 받아든 ‘행정종결 통보문’에는 허탈하기 그지없는 문구가 열거돼 있었다. 대법원의 노동자성 판단 판례에서 ‘부수적 판단징표’로 삼고 있는 것들이 여지없이 ‘노동자성을 부정하는’ 주요한 판단 근거로 등장했다. 법원은 지난 2006년 이후 ‘기본급이나 고정급이 정해져 있는지 여부’ ‘4대 보험 가입 여부’ ‘근로소득세 원천징수 여부’만을 따져 쉽게 노동자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노동부는 여전히 이들 징표, ‘사용자가 쉽게 위장 가능하고, 그래서 더욱 명확하기까지 한’ 조건을 부정의 근거로 채택한다. 법원은 계약의 형식이 무엇이든 ‘근로관계의 실질’을 봐야 한다고 하지만, 노동부는 진정인이 ‘프리랜서 계약서’를 작성했다는 점을 첫 번째로 강조했다.

무엇보다 통보문에서 다수의 판단 근거는 ‘도대체 6개월 동안 노동부는 무엇을 조사했고, 무엇을 판단 근거로 삼았는지’ 의심하게 했다. “진정인이 회의에 참석하고 다른 정규직 직원들과 협업하며 상황을 공유한 것이 진정인 단독으로 수행할 수 없는 업무 성격에 기인한 것”이라고 하면서도 “사용자의 지휘·감독에 따라 근로를 제공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고 한다. “사업장 내 근무장소를 이용해야 할 필요성이 있으나 방송업 특성상 근무장소가 사업장 내로 지정돼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은 다른 방송 정규직 노동자들도 다를 바 없다. “징계받은 적 없고, 지각·조퇴·결근 등 근태 통제를 받지 않았다는 것” 역시 성실하게 근무해 온 진정인으로서는 적용될 여지가 없었던, 말 그대로 형식에 불과한 판단징표다.

필자를 포함한 청주방송 진상조사위 위원들은 조사 기간 동안 청주방송을 오가며 다수의 정규직, 비정규 노동자들을 만나고 현장의 노동조건을 조사했다. 그리고 위 통보문에 적힌 ‘노동자성 부정의 근거들’이 얼마나 쉽게 꾸며질 수 있는지, 방송업 특성상 얼마나 많은 비정규직이 정규직과 유기적으로 결합돼 근무할 수밖에 없는지 새삼 확인했다.

방송사들은 언제든지 필요에 의해 비정규 노동자들을 부서별로 알아서 채용하고, 퇴사 이후 법률적 다툼을 피하기 위한 안전장치로서 ‘프리랜서(위탁) 계약서’를 작성한다. 한없이 약자인 비정규직이 “이건 그냥 형식일 뿐이야(=작성하지 않으면 회사 다니기 힘들어)”라면서 내미는 계약서를 거부하기란 어렵다.

애써 출퇴근 시간을 관리하지 않고, 업무 장소도 정규직과 분리하는가 하면, 월별로 거의 변동 없는 월급을 굳이 회당으로 쪼개 지급한다. 노동부가 이러한 현장 사정을 확인하려는 의지가 있었다면 무성의하고 법원 판례보다도 한참 후퇴된 통보문이 나올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이쯤되니 진정인에 대한 첫 출석조사에서 근로감독관이 필자에게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던 질문이 떠오른다. “사실 이번 진정건이 단순히 한 사람의 퇴직금 문제가 아닌 것, 아시죠?” 처음부터 노동부는 이 거대 지상파 방송사에서 근무했던 프리랜서의 퇴직금 진정 건에 대해 결론을 내려놓았던 것은 아닐까.

노동부의 통보문을 받고 일주일 뒤, 청주방송에서는 ‘CJB청주방송 고 이재학 PD 정규직 명예복직 및 명예조합원증 수여식’이 진행됐다. 청주방송 내에는 고인을 기리는 추모공간이 마련됐고, 고인의 유골함 곁에는 “2020년 7월28일부로 청주방송 기획제작국 제작팀 근무를 명한다”는 내용의 ‘사원 임명장’과 ‘명예 사원증’이 놓여졌다.

고인의 생전에 그가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할 노동자였음을 동료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법은 고인에게 ‘노동자’라는 세 글자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비로소 ‘사원증’을 얻게 됐지만, 방송 현장에서 더 이상 그의 환한 웃음을 마주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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