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호 한국노총 대변인

정기적으로 글을 쓰다 보면 소재 고갈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이번주에는 무엇을 쓰지?'라는 고민이 들 때 정치권에서 나오는 한마디는 가뭄의 단비와 같다. 예컨대, “꿈이 대통령”이라는 초등학생의 말에 “간절하게 원하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고 하거나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가 발생하자 “잘못 배우면 혼이 비정상”이라는 주옥같은 말에 쾌재를 부른다. 그래서인지 가끔 ‘옛날이 글쓰기 쉬웠다’라는 비정상의 정상화 같은 생각이 들때도 있다.

오늘의 소재 역시 여당 대표 입에서 나왔다. “천박하다.” 사용하는 한자에 따라서 뜻이 다르다. 하나는 ‘뒤섞여 고르지 못하거나 어수선해 바르지 못하다’로 풀이되고, 다른 하나는 ‘학문이나 생각 따위가 얕거나, 말이나 행동 따위가 상스럽다’로 쓰인다. 정치권이나 언론에서는 모두 후자의 뜻으로 이해되는 듯하다.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지 모르겠지만 “천박하다”는 어느 개그맨의 유행어였다.

지금은 폐지된 <개그콘서트>에는 ‘봉숭아학당’이라는 장수코너가 있었다.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 가운데 ‘영국의 권위 있는 귀족, 순수한 혈통, 루이 윌리암~스 세바스찬 주니어 3세’가 있는데 그는 말끝마다 “천박해, 천박해”를 외쳤다. 유행어 주인공은 임혁필씨다.

<개그콘서트>가 21년 만에 폐지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정치가 코미디보다 더 웃겨서’라는 웃기지 않은 이유도 그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여당 대표의 말처럼 서울시가 ‘천박’한지 부산시가 ‘초라’한지는 사실 내게는 관심 밖이다. 오히려 오랜만에 등장한 ‘천박’이라는 단어는 다른 곳에 적합하다.

기록적인 폭우로 인명피해를 입은 부산의 뉴스를 접하다가 눈길이 멈춘 사진과 영상이 있었다. 물이 허벅지까지 차오른 상황인데도 우산도 없이 배달음식을 들고 이동하는 배달원의 사진. 사진 제목은 ‘홍수난 부산의 극한직업’이었고 한 네티즌은 댓글에 “살려고 죽을 각오로 일한다”고 적었다.

빗길을 뚫고 달리는 배달 오토바이 영상도 있었다. 폭우로 도로가 잠긴 상황에서 텅 빈 거리의 어둠 속에 오토바이가 지나간다. 영상을 올린 라이더 유니온은 “이런 날씨에도 배달을 멈추지 않는 곳이 있는데요. 야만적인 나라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왜 이렇게 일해야만 했던 것일까.

대표적인 배달플랫폼 업체인 배민커넥트와 쿠팡이츠·쿠팡 플렉스는 “원하는 시간에 필요한 만큼만 일하며 돈을 벌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의 광고를 보면 감동적이다. 고양이에게 캣타워를 사주고 싶은 집사, 면접 때 입고 갈 양복은 내 돈으로 사겠다는 취준생에게 그들은 돈 벌 기회를 준다. 심지어 광고에는 코로나19로 위기를 겪고 있는 한 인쇄소 사장이 쿠팡을 통해 “반찬이 달라지는” 생활의 변화를 겪었다고 말한다. 배민과 쿠팡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당신들과 고용관계가 아닌 연결(커넥트)관계이며, 몸을 푸는 정도(플렉스)로 일을 하면 돈을 벌 것”이라고. 그리고 그들은 이를 “혁신”이라고 부른다.

정말 그러할까.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의 말을 빌어 보자. “사람들은 배달일이 진입장벽은 낮은데 수익은 높다고 말한다. 유치하게도 ‘그렇게 좋아 보이면 당신이 해 보든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먹고살려면 닥치는 대로 일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배달일의 고단함과 위험은 어느 때고 넘을 수 있는 허들이다.”

코로나19로 인해 고용시장이 꽁꽁 얼어붙은 시기에 노동력밖에 팔 수 없는 노동자에게 “원하는 때, 일한 만큼 준다”는 것은 감언이설이다.

노동자를 노동자로 부르지 못하게 하고, 사용자를 사용자로 부르지 못하게 하는 꼼수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기업으로서 이윤을 챙기면서 고용관계를 부정하고 사용자로서의 책임은 지지 않는 것을 끝까지 혁신이라 우긴다면 루이 윌리암스 세바스찬 주니어 3세의 다른 유행어를 들려 줄 수밖에 없다. “천박해, 나가 있어!”

한국노총 대변인 (labornews@hanmail.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