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효원 글로벌 인더스트리 컨설턴트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교육 요청을 받을 때마다 19세기와 20세기 운동사 자료를 뒤적이곤 한다. 당시 일어난 혁명과 전쟁으로 ILO가 생겼기 때문이다.

1848년 2월 혁명 전야에 출판된 <공산당선언> 소개는 필수다. 서른도 안 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아동노동 금지, 무상 공교육, 누진세 도입, 상속권 폐지, 중앙은행 설치, 공업과 농업의 균형 발전”을 내세웠다. <공산당선언> ‘1890년 독일어판 서문’에서 늙은 엥겔스는 국제노동운동이 “8시간 표준 노동일을 법적으로 확립한다는 하나의 당면 목표 아래 단결해 있다”고 즐거워했다. 세기를 넘겨 1919년 ILO는 첫 국제노동법으로 하루 8시간 협약(1호)을 채택했다. 1917년 10월 레닌과 트로츠키가 주도한 러시아혁명도 빠질 수 없다. 볼셰비키가 주도한 공산주의 혁명의 세계적 확산을 억제하려는 보수적 목적을 갖고 ILO가 출범했기 때문이다. 혁명의 압력하에 “사회 정의 없이는 항구적 평화도 없다”고 선언한 ILO헌장은 일터의 문명화와 노동계급의 시민권이 산업평화(industrial peace)의 조건임을 확인했다.

교육을 위해 러시아혁명사를 살펴보다 오랜만에 ‘1905년 혁명’ 자료를 읽었다. 조선반도 일대에서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1월9일 ‘피의 일요일’로 시작된 노동자혁명은 농민과 중간계급이 합세한 민중혁명으로 발전하면서 10월 절정에 올랐다. 10월26일 트로츠키와 멘셰비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를 출범시켰고, 10월30일 황제 니콜라이 2세는 군주정 붕괴를 막기 위해 자본가와 지주가 장악한 두마(의회) 설치를 허용했다. 25세 이상 남성만의 투표를 거쳐 1906년 4월27일 출범한 두마는 정치범 석방, 노동조합 권리, 토지개혁을 요구했다. 하지만 개혁파 내각을 강경파 내각으로 교체한 황제는 7월26일 두마를 해산시켰다. 귀족 출신 스톨리핀이 주도한 내각이 민주파와 혁명파에 대한 체포와 처형을 확대하는 가운데 2차 두마 선거가 1907년 1월 실시됐다.

그런데, 선거참여 문제를 둘러싸고 멘셰비키와 더불어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양대 정파 중 하나였던 볼셰비키가 내분에 휩싸였다. 보그다노프를 중심으로 한 지도부는 “무장봉기” 노선을 고집하며 선거 보이콧을 주장했다. 1906년에는 선거참여를 부정했던 레닌이 1907년 1월 선거를 앞두고 이전의 보이콧 전술이 “실수”였다면서 선거참여를 주장했다. 선거에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은 518개의 의석 중 65개를 차지했지만, 볼셰비키 내부 논란은 더욱 거칠어졌다. 레닌은 “합법적 정당조직의 광범한 정치적 경험을 쌓고 날로 궁핍해지는 민중들의 경제투쟁을 지원하고 생활 조건을 향상시키는 법안을 만듦으로써 도시빈민과 농민대중을 운동의 편으로 이끄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2차 두마가 개원한 1907년 2월20일 레닌은 “(사회)꼭대기에서 우익으로의 이동, (사회)바닥에서 좌익으로의 이동, 정치적 양극화”로 정세를 분석했다. 그러면서 볼셰비키들은 민주주의자들의 지도자가 돼 민중을 지원하는데 활동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역설했다. 1906년 8월부터 러시아령 핀란드 영토에 숨어 지내던 레닌은 비밀경찰의 추적이 강화되자 1907년 11월 스위스로 다시 망명길을 떠났다. 이 시기 레닌은 선거 분석과 의회 전술에 관해 엄청난 양의 문건을 쏟아냈다.

2차 두마도 오래가지 못했다. 민주파와 혁명파의 득세에 불안해진 황제는 1907년 6월3일 두마를 해산시켰다. 1906년과 1909년 사이에 정치범 3천명이 처형됐다. 개악된 선거법을 통해 3차 두마가 1907년 11월4일 출범했다. 반동파가 민주파를 압도했고,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의석은 19석으로 크게 줄었다.

3차 두마 참여를 둘러싸고 볼셰비키 내부 갈등은 폭발했다. 보그다노프를 정점으로 하는 강경파는 의원 소환을 주장했고, 소환 거부 시 출당시키는 최후통첩을 고집했다. 레닌은 전자를 ‘소환파’, 후자를 ‘최후통첩파’로 규정하고 “고조기와 쇠퇴기의 전술은 달라야 한다”면서 참여파를 옹호했다. 1908년 2월과 10월 사이 레닌이 제네바·런던·파리를 오가며 쓴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은 거부파에 대한 레닌의 결별선언이었다.

지금은 한물간 고물 취급을 받는 운동의 고전들을 읽으면서, 낡은 이념 암기를 통한 죽은 관념론이 아니라 역사 발전을 토대로 한 살아 있는 변증법적 방법론의 중요성을 되새긴다. <공산당선언>에서 필자는 “굳고 녹슨 모든 관계들은 해체되고 사람들은 생활상 지위와 상호 연관들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글귀를 좋아한다. 레닌 저작에서 필자가 받는 영감은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이 아니다. “아무리 반동적일지라도 노동자 대중이 있는 기구와 협회와 단체들에서 체계적으로 참을성 있고 끈덕지고 끈기 있게 버티면서 어떠한 희생도 치를 수 있어야 하며 어떠한 난관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운동론이다. “불리한 싸움을 피하기 위해 유연한 대응을 하고 협조나 타협을 꾀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고 쉰 살 레닌은 썼다.

ILO 협약 교육 준비를 하면서 작금의 민주노총 운동을 돌아본다. 코로나19 정세에서 최저임금위원회를 박차고 나왔다. 사회적 대화를 둘러싼 갈등으로 날을 지새운다. 최저임금이 올라야 월급이 오르는 노동자는 “최저임금 투표에 참가했으면 10원이라도 더 올렸지 않겠느냐”며 민주노총의 투표 거부에 분통을 터트렸다. 노조가 없는 공장에서 일하는 또 다른 노동자는 미조직 영세사업장 노동자를 위한 사회정책이 담긴 노사정 합의안을 폐기시키려는 민주노총 내부의 ‘거부파’에 불만이 많았다. “타협에는 별의별 게 다 있다. 개개의 타협 또는 각양각색의 타협 상황과 구체적인 조건들을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모든 사건에 대해 판에 박힌 해결책이나 제시하면서 어떠한 어려움도 어떠한 복잡한 상황도 없을 것이라 약속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협잡꾼에 불과하다”고 레닌은 썼다.

“결론은 명쾌하다. ‘원칙상 타협’을 거부하는 것, 어떤 것이든 타협 일반의 허용 가능성을 거부하는 것, 그것은 진지하게 고려하기조차 어려운 어리석은 짓이다.”

글로벌 인더스트리 컨설턴트 (globalindustryconsul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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