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호 노동운동가

한 노동자가 있다. 일을 찾아 전국을 헤맸다. 뜻대로 안 되는 날은 단돈 몇천 원이 없어서 끼니를 걸렀다.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많았다. 그러다 방안을 찾았다. 밥때가 되면 노인정을 찾아 헤맸다. 딱한 사연을 들은 노인들은 안타까워하며 밥그릇 수북이 담아 줬다. 그렇게 노인정에서 밥을 얻어먹고 허기를 달래며 밑바닥 노동의 설움을 가슴속 켜켜이 쌓았다. 아내와 자식들은 모르는 비밀이다. 지금은 우편집중국 비정규직이고 우편물을 분류한다. 공공운수노조 조합원도 됐다. 만날 때마다 야근에 찌든 몰골, 우편집중국은 양대 노총 비정규직 중에도 안 좋은 처지인데, 그래도 정말 진지하게 지금이 더없이 행복한 천국이라고 말한다. 그는 내 죽마고우다. 소주잔 마주칠 때마다 벗이 겪었던 노조 바깥 밑바닥 노동을 떠올리며 나는 몸서리친다.

이런 노동자도 있다. 임금은 10여년 동안 300만원 밑에서 진척이 없다. 가족 생계에 들어가는 돈은 자꾸 늘어난다. 돈 빌리는 것에 한계가 있다 보니, 만만한 게 신용카드 현금서비스다. 쓰게 되면 이자 높고 신용 떨어지는 것을 알지만 별수 없다. 곶감 빼먹듯 쌓였고 서비스가 한도에 찼다. 매월 최소결재로 버티는데, 마감을 놓쳤다. 깜박한 상태의 퇴근길, 버스에 타며 요금결재기에 카드를 댔는데, 삐 하고 울렸다. 아차, 당황하며 내렸다. 버스는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냉정하게 출발했다. 그는 야속하게 떠나가는 버스를 맥없이 바라봤다. 작은 건물 청소노동자인 아내에게 동네 입구로 택시비 갖고 나오라고 연락할까, 망설이던 그는 포기하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1시간30분 남짓, 집에 도착하니 속옷은 땀에 젖었다. 추운 겨울이었다. 노조 바깥 밑바닥 조직화 과정에서 만난, 두 딸 둔 40대 중반 노동자의 사연이다.

한 노동자의 아내가 있다. 뉴스 속 세상은 온통 해외여행인데, 자신의 가족은 먹고사는 것만도 버거워서 제주도여행조차 해 본 적이 없다.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가 제주도여행을 소망하며 기도했다. 신을 원망하면서 울기도 했다. 사연을 알게 된 친구가 그녀의 몫을 감당하고 둘이 제주도여행을 했다. 페이스북 친구가 전한 아린 사연이다. 이전 칼럼에서 소개된 내용이다. 그 뒤 그녀 가족이 그녀의 서글픈 소망대로 제주도여행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출근하는 서울 창신동은 전태일의 평화시장 후예들이 하루하루 생계를 꾸려 가는 봉제 밀집지역이다. 골목골목 낡은 건물마다 다닥다닥 온통 소규모 영세 공장이다. 오며 가며 인사하는 옆 건물 지하공장 사장이 말했다. 일감이 줄어 두 달 임대료를 내지 못했다고 했다. 늦장가였는지 갓난아기가 있다. 아기 우유는 챙기고 있는지 걱정이 앞섰다. 지금은 사장 포함 셋이 일한다. 대여섯이 일하던 공장이다. 나머지 절반은 일이 없어 쉰다. 사업주 대상의 기존 방식 노조로는 답이 없다. 비수기에 코로나19까지 겹친 탓인데, 국민을 향해 왜 옷을 사지 않느냐고 투쟁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양대 노총 안 웬만한 비정규직보다 못한 처지의 사장과 노동자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해고 금지가 아니다. 하루라도 더 버틸 수 있는 생계 및 운영자금 지원이다.

소개한 사연의 노동자들이 노조 바깥에 있다. 30명 미만 노동자 숫자가 1천175만명이다. 노조 가입률은 고작 0.1%고 조합원을 다 합쳐도 공무원노조 조합원 숫자의 10분의 1도 안 된다. 연소득은 3천만원이 안 된다. 그중 절반은 2천만원이 안 된다. 이들에게 코로나19 위기가 집중되고 있다. 위기에서 허덕대는 이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하루하루 버틸 수 있는 운영자금 지원이다. 그래야 그 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임금을 받을 수 있다. 이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생계자금 지원이다. 그래야 가족이 당장 버틸 수 있다. 합의안 1장, ‘고용유지를 위한 정부 역할 및 노사 협력’만으로도 민주노총이 승인해야 하는 절박한 이유다.

민주노총 대의원들은 바로 이들, 노조 바깥 밑바닥에서 힘겨워하는 노동자·민중의 구구절절한 처지를 봐야 한다. ‘코로나19 위기극복을 위한 노사정 합의’가 부족하더라도 반드시 승인해야 하는 이유다. 합의의 주체가 돼 사회적 영향력과 정치력을 확보하고, 그것을 지렛대로 특수고용 및 전 국민 고용보험 등 부족한 부분을 따내기 위해서 더 밀어 가야 하는 이유다. 합의를 거부하는 순간, 민주노총에 더는 협상 기회가 없다. 국민의 신뢰도 땅바닥으로 추락한다. 투쟁으로 돌파하면 된다는 주장은 소규모 집회조차 어려운 코로나19 상황에다가 민주노총 내 각종 선거가 코앞인 상황에서 자기기만의 아무 말 대잔치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민주노총 대의원들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끝으로 덧붙인다. 비정규직이 합의를 반대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들의 투쟁을 존중한다. 다만, 민주노총 안의 비정규직은 소득기준 상위 30% 안에 드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민주노총 안의 정규직보다 더 나은 경우도 많다. 근속연수 등에서도 노조 바깥의 밑바닥 정규직보다 훨씬 낫다.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때였다. 앞집 이웃이 이런 부탁을 했다. 기아자동차 같은 곳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할 수 있게 해 달라 했다. 달러 빚이라도 내겠다 했다. 나는 정색했다가 그가 무안해하는 것 같아 웃으며 마무리했다. 씁쓸해하며 현장활동가에게 얘기했더니, 누군가 거기 비정규직이 되니까 어떤 시골 마을에서 축하 현수막이 걸렸다고 했다. 1천만명에 이르는 노조 바깥 밑바닥 노동은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노조 안 웬만한 비정규직보다 한참 못한 처지로 살아간다. 비정규직이 반대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노조 바깥 밑바닥 노동의 생각이 어떻고 무엇을 희망하는지 여론조사라도 한 번 하자고 제안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다.

노동운동가 (jshan896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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