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포 당시 신채호 선생. 국가보훈처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다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토를 없이하여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에 대한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로 시작해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로 마치는 6천400여자의 조선혁명선언문은 일제하에 나온 여러 선언 중 문장이나 내용면에서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1923년 2월 의열단 명의로 나온 것이라 의열단 선언문이라고도 명명할 수 있었지만 굳이 ‘조선혁명선언’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의열단 활동을 넘어서 당시 독립운동의 한 조류를 형성한 외교론·자치론을 배격하고 조선 민중이 주체가 되는 민족주의 혁명이념을 독립운동의 나아갈 방향으로 제시하고자 한 데 있었다. 민족해방전쟁의 선전포고문과도 같은 독립운동사의 기념비적인 이 문건은 문장에 기백이 넘치고 가슴을 격동하게 하는 힘이 있어 당시 독립운동 진영에 몸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의열단 청년 단원들이 늘 소지하고 탐독하는 문건이었으며 거사 뒤에 현장에 뿌려져 정당성을 천명하는 근거로 활용됐다. 이 불후의 역사적인 문헌을 완성한 이가 단재(丹齋) 신채호(1880~1936)다. 그는 이 선언문 외에도 언론인이자 역사학자로서 많은 글과 저작을 남겼다. 한평생 붓을 놓지 않은 지식인으로서 그의 붓은 호연하고 정의로웠으며 만인의 흉금을 울려 총탄보다도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한평생 붓을 가지고 싸운 독립운동의 지사요 전사였던 것이다.

학문에 매진하다

단재는 1880년 12월8일 당시 충청도 회덕현 산내면 도림에서 아버지 신광식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대대로 문과에 급제한 양반 가문으로 고령 신씨 신숙주의 18대 후손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변절의 상징이기도 한 그의 조상 신숙주와는 180도 다른 삶을 살았다. 그의 호 단재도 정몽주의 단심가의 일편단생에서 나온 것으로 정몽주처럼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단심(丹心)의 삶을 살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

어렸을 때 그의 집안은 매우 궁핍했다. 그의 체구가 왜소하고 볼품없는 것은 어렸을 때 제대로 먹지 못한 결과로 보인다. 게다가 그의 나이 7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집안 형편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할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공부하며 자라게 됐다. 그러나 그는 수재형으로 머리는 비상해 열 살에 자치통감을 독파하고 행시를 지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14세에 사서삼경을 독파해 인근에 신동으로 소문이 날 정도였다.

그가 살던 향리에서는 더는 읽을 만한 책이 없게 됐다. 지식에 대한 갈증이 컸던지라 할아버지인 신성우와 스승인 신승구의 주선으로 당시 중추원 부의장으로 목천에 있던 신기선을 소개받아 그의 집에 있는 많은 다양한 책들을 접할 수 있었다. 19세에 신기선의 추천으로 당시 국립대학격인 성균관에 들어갔다, 그는 한 번에 열 줄씩 읽는 독서기법으로 독서를 했다고 하며 많은 책을 읽어 기존 성리학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고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성균관에서도 그의 존재는 단연 돋보였으며 장안에 기재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25세에 성균관 박사가 됐다.

필봉을 휘두르다

돌아가는 정세와 시국에 눈을 뜨게 된 그는 성균관에 있으면서도 독립협회 운동에 참여해 일시 투옥되기도 했다. 25세 되던 해 위암 장지연을 만나 황성신문에 몸담게 됐다. 언론인으로서 그의 삶이 시작됐다. 장지연이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듣고 그 유명한 ‘시일야방성대곡’의 논설을 쓰게 되고 그 여파로 이후 신문이 폐간되자 1906년 대한매일신보로 자리를 옮겨 가게 됐다.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 베델(Bethel)이 운영하는 신문사로서 통감부의 검열과 탄압을 받지 않았다. 단재는 신문사 논설기자로 있다가 주필이 돼 논설을 주관하게 됐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기까지 4년간 그나마 안정된 생활 속에서 맘껏 필봉을 휘두를 수 있었다. 그는 동포들에 대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각성을 촉구하는 수많은 시국논설과 역사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금일 대한제국의 목적지’ ‘한국 자치제의 약사’ ‘큰 나와 작은 나’ ‘친구에게 절교하는 편지’ 등 많은 시국논설을 기재하고 근대 민족사학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독사신론>을 연재하고 민족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영웅의 출현을 갈망하면서 <수군제일 위인 이순신전> <동국거걸 최도통전> 등 영웅전기를 연재하기도 하였으며 <이태리 건국 삼걸전> <을지문덕전>을 편찬하기도 했다.

엄격하고 강직한 성품

그는 괴벽스럽고 고집불통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강직했다. 특히 친일과 매족행위에는 단호했다. 신기선은 단재에게 서재를 개방해 책을 보도록 하고 성균관에 천거한 장본인으로 어떻게 보면 단재에게 은인과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단재는 매일신보에 ‘일본의 3대 충노’라는 제목의 논설을 썼는데 송병준·조중응과 함께 신기선을 충노 세 사람 중 한 사람으로 지목하고 가차 없이 비판했다. 공사를 분명히 한 단재의 성품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의 나이 20세 되던 해 8살 연상인 형 신재호가 28세 나이로 어린 딸 향란을 남기고 요절하자 그는 향란을 책임져야 했다. 1917년 향란이 친일파 집안과 혼사가 있다는 기별을 듣고 이를 만류하고자 중국으로 망명 중에 위험을 무릅쓰고 고국으로 잠입했다. 그러나 향란이 삼촌의 말을 듣지 않자 의절하고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까지 했다.

북경에 있을 때 그는 북경일보와 중화보에 논설을 기고하면서 원고료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단재의 논설은 인기가 좋아 발행부수를 4천~5천부 늘리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원고를 중화보가 임의로 고쳤다고 해서 집필을 거부했다. 사장이 찾아와 사죄를 했으나 질책만 받고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신문사에서 고친 것은 어조사인 ‘의(矣)’ 자 한자에 불과했다. 사실 없어도 무방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인이 조선인을 무시한다고 하여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늘 돈에 쪼들리고 살았지만 돈에 비겁하거나 굴하지 않았다.

여순감옥에서 복역 중 건강이 악화돼 친지들이 주동이 돼 같은 집안 내 친일인사를 보증인으로 해서 가출옥을 제안했으나 단재는 단호히 거절했다. 친일파에게 자신의 몸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원고조차도 나중에 보아 맘에 들지 않으면 다 불태우거나 찢어 버렸다. 그 자신에게도 가혹하리만치 엄격했다.

역사가 된 독립운동가로서의 삶

단재의 진면목은 독립운동가로서 그의 삶에 있다. 언론가로서 역사학자로서 사상가로서 문인으로서 교육자로서 다양한 삶의 면모를 보여줬지만 이 모든 것은 오로지 민족의 자주독립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방편이었다. 그는 3·1 운동 1개월 전에 발표한 무오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렸고 임시정부 수립시 29인 발기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임시정부 수반을 뽑는 선거에서 이승만이 추천되자 그는 맹렬히 반대했다. 이승만이 1919년 2월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국제연맹의 조선 위임통치를 청원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는 자주독립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은 자란 말이오” 하고 성토하고 회의장을 박차고 나왔다. 이후 단재는 임시정부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앞에 소개한 조선혁명선언문에도 외교론과 자치론을 배격하는 내용이 있지만 단재는 임정의 이러한 노선을 반대하고 민중주체의 무장투쟁·폭력혁명 노선을 지지했다.

이후 북경에서 주로 기거하면서 조선사 연구에 매진했다. 1920년 40세 때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여사의 주선으로 유학생인 박자혜라는 여성과 재혼했다. 슬하에 아들 둘을 두었으며 1922년 생활고로 아내와 두 자식을 고국으로 보내고 혼자 지내며 역사연구에 매진해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등을 저술했다. 1924년에는 약 1년간 승려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단재는 아나키즘에 경도돼 갔다. 아나키스트가 된 것도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1926년에는 무정부주의자 동방연맹에 가입하기도 하고 1928년 4월에는 천진에서 한국인 아나키스트 대회를 열어 그가 작성한 선언문이 채택되기도 했다. 북경 교외에 폭탄과 총기공장을 건설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려 외국 위체(환)의 위조 및 환전을 기획했다. 북경을 떠나 일본 모지항을 거쳐 대만 기륭항으로 가서 중국인으로 위장해 기륭 우편국 위체계 창구에서 현금 수령을 기다리다 기륭경찰서 형사들에게 체포돼 대련으로 압송됐다. 이후 ‘외국 위체 위조사건’ 관련자로 대련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여순감옥으로 옮겨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8년 만인 1936년에 2월21일에 뇌일혈로 옥중에서 순국했다.

▲ 노세극 4·16안산시민연대 공동대표

독립운동에 온 생을 바친 그의 삶은 민족과 자신을 완벽히 일치시킨 삶이었으며 붓이 칼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민족의 사표이며 정신적 표상이었다. 민족사를 새로 씀으로써 우리 고유의 민족의 얼과 정신을 고양했으며 그 자신 후대를 밝히는 역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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