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윤수 축구평론가

‘더비 전’(Derby Match)이라는 말이 있다. ‘로컬 더비’(Local Derby)라는 말도 쓴다.

같은 지역을 연고로 하는 유서 깊은 라이벌 경기를 뜻한다. 단어 유래가 여러 갈래다.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는 축구경기로 본다면 우리의 광역자치구인 더비셔의 소도시 애시본에서 열리고 있는 중세식 축구대회가 대표적이다. 지역 내 라이벌전, 즉 더비 경기가 얼마나 ‘화끈’한지 알 수 있다. 애시본의 헨모어강 북쪽 주민과 남쪽 주민들이 광장에 모여 축구를 시작하는 데 1초도 지나지 않아서, 통상의 축구경기는 물론이고 몸싸움이 심한 럭비도 그저 얌전한 아이들 놀이처럼 여기게 만드는 격렬한 경기가 온종일 전개된다. 광장·도로·강·밭·골목이 다 경기장이고 모두가 구경꾼이면서도 동시에 모두가 선수다. 유튜브로 ‘더비셔 애시본’이라고 검색해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이렇게 격렬한 더비전이 세계 곳곳에서 열린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AC밀란 대 인터밀란, 런던의 아스널 대 토트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카 주니어스 대 리버 플레이트, 독일 베스트팔렌의 도르트문트 대 샬케04, 터키 이스탄불의 갈라타사라이 대 페네르바체RK. 지역 내 라이벌전, 즉 더비의 세계적인 현장이다. 참고로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의 경우 세계 축구팬들이 꼭 한번 직관하고 싶은 ‘라이벌전’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지역 내 라이벌은 아니다.

지역 내 라이벌전이 펼쳐지면 도시 전체가 이중가면을 쓰게 된다. 한편으로는 흥겨운 축제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천 명의 열성팬과 또 그만큼의 경찰력이 맞붙는 공포의 순간이다. 100년 이상의 현대사 과정에서 정치·종교·인종·문화에 의해 숱한 갈등과 대립을 주고받으며 전개된 도시의 역사, 그 속에서 치러지는 축구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과격한 팬들이 난동을 부린다’는 식으로 보면 안 된다.

가장 격렬한 더비, 레인저스 대 셀틱

이러한 더비전 중에서도 가장 격렬해서, 역설적인 의미에서 세계 팬들이 꼭 한번 직관하고 싶은 경기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의 레인저스 대 셀틱의 맞대결이다. 글래스고의 축구, 나아가 스코틀랜드 축구역사는 라이벌인 레인저스와 셀틱이 양분한다. 두 팀의 우승 횟수를 합하면 100회에 가깝다. 그래서 ‘올드펌(Old firm)’ 더비, 즉 너무 오랫동안 독식하고 있다는 뜻으로도 불린다. 대기근으로 인해 오직 살아남기 위해 황급히 스코틀랜드로 이주한 아일랜드의 구교 이주자들이 중심인 셀틱과 글래스고 토박이 신교도가 중심인 레인저스의 갈등은 이후 종교·신분·계급·교육 차이를 축구장에서 극명하게 표출하는 라이벌전으로 전개됐다.

아마도 셀틱 열혈팬이 우연히라도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왜 셀틱 대 레인저스라고 안 쓰고, 레인저스를 앞에 표기했냐고 항의할 것이다. 그 팬에게 살짝 양해를 구한다면, 물론 당연히 필자 역시 1887년 창단한 이래 거친 축구의 매력을 전승해 온 녹색 유니폼의 셀틱을 존중한다. 다만 오늘 다룰 소재가 레인저스와 관련이 있을 뿐이다.

레인저스는 최근 몇 년 동안 어려움을 겪어 왔다. 한때 4부 리그까지 추락했다. 구단 경영을 잘못하는 바람에 무려 1억3천400만파운드(약 2천333억원)에 달하는 부채에 짓눌린 적이 있다. 2012년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SPL)와 스코틀랜드 축구협회(SFA)는 레인저스가 법정관리에 들어갔을 때 승점 10점 삭감 조치를 발표했다. 회생이 어렵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4부 리그까지 강등시켰다. 가혹한 조치라는 면도 있지만 국제축구연맹(FIFA)과 유럽축구연맹(UEFA)이 추구하는 구단 운영 투명성과 리그 재정건전성을 위한 조치였다.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열심히 뛴다고 해서 ‘프로구단’이 운영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불투명한 경영과 열악한 재정은 경영상 모든 과정에 걸쳐 부정과 협잡이 발생할 수 있다.

1부 리그로 부활한 레인저스, 성소수자 서포터스 공인

다행히 레인저스는 그와 같은 파탄까지는 가지 않았다. 한 계단씩 밟고 올라와서는 2016년부터 1부 리그로 부활했다. 평균 4만 관중이 수년 동안 4부에서 1부로 올라가는 레인저스를 성원했다. 1부 리그로 회생한 2016~2017 시즌에서 라이벌 셀틱에 1 대 5로 대패하자 원정팀 레인저스 광팬들이 홈팀 셀틱의 경기장 화장실을 완전히 박살 내 버리면서 말이다.

이러한 구단 안팎의 어려움에도 레인저스는 놀라운 일을 동시에 해냈다. 2018년 11월 레인저스 구단은 기존의 공식 서포터스 단체에 새로 한 단체를 공인했다. 새로 공인된 서포터스 단체 이름은 ‘아이브록스 프라이드’(Ibrox Pride). 아이브록스는 레인저스의 홈구장 이름이다. 이 단체 구성원은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성전환자·간성인이다. 각각의 앞 철자를 따서 ‘LGBTI’라고 표기한다.

축구 하면 거친 남성의 표현의 장으로 여기기 쉽다. 스코틀랜드 하면 왠지 모르게 전통을 숭상할 듯하며 더욱이 레인저스 하면 할아버지에서 손자까지, 즉 남성들이 경기장을 가득 채울 것만 같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이브록스 프라이드가 결성됐고 레인저스 구단은 공식 인정했다. 다른 단체와 지역주민들도 이들을 존중하게 됐다.

이런 일이 저절로 일어난 게 아니다. 무엇보다 ‘아이브록스 프라이드’ 구성원들의 열띤 활동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성 정체성과 축구가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구단이 이를 존중했다. 2018년 레인저스 구단 운영진은 성소수자 축제인 ‘프라이드 글래스고 퍼레이드’에 참가해 행진했다.

또한 레인저스는 ‘다양성과 포용 헌장’을 채택했다. 스포츠에서의 혐오와 차별을 분명하게 반대하고 구단 운영과 경기 진행 과정에서 연령·장애·성별·민족·인종·신념·성적 지향 또는 기타 모든 특성에 상관없이 모두 환영받아야 하며 안전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혐오와 차별의 경기문화를 근절함은 물론 이를 자극하고 표출하는 행위를 엄단하고, 그러한 팬은 영구히 경기장에서 추방하겠다는 결의 또한 표현했다. 이런 정도라면, 셀틱 팬들도 레인저스를 한편 존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축구평론가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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