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일 오후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면세점 본점 12층. <어고은 기자>

“식당은 오른쪽으로 가셔서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지난 25일 오후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면세점 본점 12층 샤넬 화장품 매장 앞. 11층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온 고객들이 두리번거리며 식당가 위치를 묻자 샤넬 매장 직원은 13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위치를 알려 주는 ‘안내데스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지난해 이맘때쯤이면 면세화장품을 구매하러 온 손님들을 응대하느라 분주했을 시간이다.

지난해 단일 점포 기준 세계 1위 매출 면세점이라는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롯데면세점 본점(9~12층)은 텅 비어 있었다. 매장문이 열리기도 전부터 면세점 입구에서 130미터가 넘는 줄을 섰던 다이궁(중국인 보따리상)들도 한 층에 적게는 대여섯, 많게는 열 명 정도 보일 뿐이다. 면세점 매장 직원들은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를 보거나 재고정리를 하며 힘겹게 단절의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같은날 찾은 서울 중구 장충동 신라면세점·회현동 신세계면세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줄지은 관광객 행렬은 물론이고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신세계면세점 명동점 11·12층에는 일부 화장품 매장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매장 매대에 물건만 진열돼 있을뿐 조명이 꺼진 채 ‘임시 휴업’ 안내문이 붙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하늘길이 막히며 직격탄을 맞은 면세점업계가 울상이다. 한국면세점협회에 따르면 지난 5월 국내 면세점 매출은 1조179억원을 기록했다. 4월 매출이 9천867억원으로 사상 처음 월 매출 1조원 벽이 무너진 뒤 한 달 만에 회복한 것이지만 코로나19 사태가 심각해지기 이전인 1월 매출액이 2조247억원을 찍었던 것에 비하면 아직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업계 타격은 노동자에게 이어진다. 면세점에서 일하는 노동자 가운데 본사 정규직은 10%가 채 되지 않는다. 나머지 90%는 본사 비정규직이거나 각 브랜드에서 나와 판촉업무를 하는 파견직, 포장업무 등을 하는 협력업체 소속 직원들이다. 업체 규모와 고용형태에 따라 코로나19 재난에 피해 정도나 양상에도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미 협력사 직원들이 무급휴직을 강요받거나 권고사직하고 있다는 증언이 계속 나오고 있다. 백화점면세점판매서비스노조가 8일 발표한 ‘코로나19 면세점 협력업체 운영현황’에 따르면 버버리코리아는 전 직원에게 1개월 무급휴직을 지시했다. 크로노스DFS는 권고사직 또는 무급휴직 중 선택하라고 했고, 삼경리테일은 무급휴직 비동의시 사실상 퇴사 처리했다.

19년 일한 곳에서 권고사직
“직장 없어질까 봐 매일매일 불안”


실제로 면세점 협력업체 직원들의 고용불안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장난감·민예품 등을 판매하는 A(43)씨는 19년간 일한 직장에서 이달 말 떠나게 됐다. 회사가 인천국제공항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A씨는 “일단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버티려 한다”며 “유통업체 타격이 제일 심해 취직할 데도 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A씨 상황은 이미 지난 3월부터 예고됐다. 이 업체는 코로나19 사태로 매출이 급감하자 직원들의 임금을 30% 삭감하고, 4명의 직원들을 차례차례 권고사직으로 내보냈다. 새로 입점할 업체도 마땅히 없어 이 업체가 있던 자리는 당분간 빈 상태로 남게 될 예정이다.

A씨는 “나갈 업체들이 줄줄이 있다”며 “매대에 진열만 해 놓고 직원 없이 무인으로 운영하는 곳들도 있다”고 전했다. 방문객이 없다 보니 매대 직원을 따로 두지 않고 다른 업체 직원들에 의해 물품 도난 감시 정도만 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김치·초콜릿·홍삼 같은 식품을 파는 브랜드에서 매니저로 일하는 B씨 역시 동료 5명이 퇴사해 혼자 남은 상황이다. 회사는 지난달까지만 해도 고용유지지원금을 받으며 무급휴직을 이어 왔는데 이달에 상황이 악화되자 직원을 다 내보냈다. B씨는 “(손님이 없으니) 매일 출근해서 대기만 하고 있다”며 “직장이 없어질까 봐 매일매일 불안하다”고 말했다.

B씨는 근무일수가 20일에서 15일로 줄어들고 임금도 40%가 줄었다. 빠듯한 살림에 지출을 줄이기로 마음먹고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4천원짜리 직원식당 식삿값이라도 아끼려는 노력이다. 직원 셔틀버스가 5월부터 운행을 하지 않아 1시간 거리를 대중교통으로 통근할 때면 매장에 도착하기 전부터 지칠 때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7천~9천원 공항리무진버스 비용을 내기엔 부담이 된다.

B씨는 “공항 내 커피숍도 한두 곳 빼고는 휴업하고 있고, 20명이 근무하던 매장에 4~5명만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동료들끼리 회사에서 쫓겨나기 전에 “카드를 만들어 놓자” “신용대출을 받아 놓자”는 말들도 오간다고 한다.

김성원 노조 면세점업종본부장은 “연차 소진에서 무급휴직으로, 무급휴직에서 권고사직으로 전환되는 속도가 업체 규모가 작으면 작을수록 가속화한다”며 “영세업체일수록 노동자들의 피해도 클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본사 정규직 희망자 한해 무급휴직
“사드에 비해 10배 충격”


고객층 가운데 내국인 비중이 높았던 향수·바디제품을 파는 업체 직원 C(44)씨는 사정이 그나마 나은 편이다. 근무일수도 줄어들고 임금도 15~20% 적게 받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버틸 만하단다. C씨는 면세점 매출의 60~70%가 나온다는 피크타임(오전 6시30분~9시30분)에 물밀듯 쏟아지는 고객들을 응대하는 대신 휴대전화를 이용해 중국어나 본사교육을 듣고 있다고 전했다.

반면 면세점 본사 정규직 직원들은 피해 양상이 다르다. 면세점 3사는 단축근무나 단기휴직 제도를 도입해 시행 중인데 자발적으로 신청을 받는다. 롯데면세점은 3월부터 주 3일제·주 4일제, 2주·4주 무급휴직을 직원들에게 선택할 수 있게 했다. 신라면세점은 6월부터 서울본사 직원들을 대상으로 기존 월급의 70%를 받는 유급휴직을, 신세계면세점은 5월부터 70~80%를 받는 유급휴직을 신청받았다.

그런데 5개월째 이어지고 있는 코로나19 사태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으로 전망돼 이들의 상황도 녹록지만은 않다.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보복’으로 타격을 받았던 롯데면세점은 당시에도 희망자에 한해 무급휴직을 진행했다. 손이주 롯데면세점우리가치노조 사무국장은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며 사태의 심각성을 전했다. 손 국장은 “사드 때도 내국인 판매는 원활히 이뤄져 피해를 점차 회복했다”며 “그때 10명이 무급휴직에 들어갔다면 지금은 100명이 휴직하는 상황”이라고 귀띔했다.

C씨도 “9월 중순까지는 고용유지지원금을 (급여의) 90%까지 받을 수 있지만 이후에는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며 “고정적 지출비는 계속 나가는데 수입이 줄어드는 것이 걱정된다”고 말했다.

김성원 본부장은 “한국에서 코로나19가 안정된다고 면세점이 잘 되는 건 아니다”며 “전 세계가 안정권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영세업체뿐만 아니라 중견업체들까지 구조조정 바람이 불 것으로 전망된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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