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교양 프로그램을 주로 제작하는 독립PD A씨는 특수고용직·프리랜서에게 정부가 지급하는 코로나19 긴급고용안정지원금을 신청하지 못했다. 정부는 코로나19 본격 확산기인 3~4월의 소득감소 증명을 요구하는데, 서류상으로 증명하기 어려워서다. 그는 지난해 12월 모 방송사 특집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고, 방송 후 제작비를 지급하는 업계 관행에 따라 2·3월 두 달에 걸쳐 제작비를 받았다. 3·4월에 예정됐던 공연·전시 영상편집 아르바이트는 취소돼 일감과 수입 모두 줄었다. 그는 “우리가 어떤 패턴으로 일하는지 고용노동부도 문화체육관광부도 잘 모르는 것 같다”며 “(방송노동 현장은 직군별로 계약방식이 너무 달라) 정부 지원에 구멍이 많다”고 말했다.

드라마 현장에서 주로 일을 하던 프리랜서 감독 B씨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는 2월부터 촬영하기로 한 드라마 제작 일정이 코로나19로 미뤄져 일이 뚝 끊겼다. 2월부터 5월까지 건설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전기배선 일을 하던 B씨는 이번달부터 촬영작업에 들어가게 됐다.

장시간 노동에 밀집 노동까지

21일 방송현장 노동계에 따르면 방송 비정규 노동자들이 코로나19 사태로 고용·안전 위기에 그대로 노출되고 있다.

방송작가유니온이 지난 4월 작가 15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중 69.6%가 코로나19로 계약대기나 무급휴가 상태에 처해있었다. 해고·계약해지를 당한 사람은 6명 중 한 명꼴(15.6%)이었다. 같은달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지부장 김기영)와 추혜선 정의당 의원이 발표한 독립PD·방송(외주)작가 노동실태와 정책지원 방안 연구결과에 따르면 독립PD 40%가 코로나19로 직접적인 임금 손실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기영 지부장은 “코로나19와 관련해 상반기 내내 일을 못한 방송 비정규직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안전대책 없이 근무를 강요받는 방송 비정규직 사례도 소개했다. 외주 제작사 연출부 소속 조합원이 최근 겪은 것으로, 일하는 건물에서 확진자가 나왔는데도 제작사에서 동선·발열 체크 없이 드라마 촬영을 강행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노조에서 제작사와 연락해 안전조치를 약속 받은 뒤에야 동선을 바꿔 촬영에 들어갔다고 한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지난달 홈페이지에 게시한 ‘코로나19와 방송 노동자’라는 제목의 상담사례 재구성 만화에는 이중고를 겪는 방송 비정규직 고충이 잘 드러나 있다. “편성이 확정됐지만 기획료도 못 받았다”거나 “많은 스태프가 장시간·야간 노동을 유지하며 안전대책 없이 밀집 노동을 하는” 사례다. 근로자성을 인정받지 못한 이들은 방송사(원청)-제작사(하청)구조에서 가장 밑바닥 ‘을’이 돼 “위험하게 일하거나 일이 끊기거나”의 선택을 강요받는다.

진재연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사무국장은 “코로나19 시대의 방송노동 현장의 문제는 코로나19 이전부터 쌓여온 구조적 취약성의 문제”라며 “불안정한 비정규직 프리랜서는 산재보험이나 고용보험같이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표준근로계약서 도입 논의 지지부진

방송 비정규직은 프리랜서 계약을 맺는 독립PD·방송 작가, 제작사·방송사와 턴키계약이나 도급계약을 맺는 조명·녹음직 현장 스태프, 프리랜서나 계약직인 방송사 내부 자막·CG 비정규직 같은 여러 직군을 모두 포함한다. 방송사나 제작사로부터 업무지시를 받지만 계약방식이나 계약조건은 직군별로도 표준화돼 있지 않다.

김기영 지부장은 “어떤 계약서를 보니 지상파 모 방송사는 법정소송이나 손해배상을 전부 비정규직 책임으로 돌려놓았다”며 “표준근로계약서와 같은 근로계약의 기본조차 돼있지 않은 것이 방송노동 현장”이라고 비판했다.

진재연 사무국장은 “방송현장은 프리랜서·구두계약·무(無)계약·용역계약같이 근로기준법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이 대부분”이라며 “무늬만 프리랜서인 방송 비정규직을 보호할 수 있는 표준근로계약서 같은 안전망이 현재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노동계는 꾸준히 “방송 비정규직은 위장 프리랜서”라며 표준근로계약서 도입과 표준인건비 기준 수립을 방송사·제작사에 요구해 왔다.

지난해 지상파 방송 3사와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 언론노조,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는 4자 협의체를 꾸려 드라마 제작환경 개선을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의견 차이로 한 차례 중단됐다가 이달부터 재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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