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회찬재단 사무총장

50년 묵은 제안서다. 당시 이 제안서는 발송되지 못했고, 제안서를 작성한 이가 이 세상에 꿈만 남기고 떠난 지 50년의 세월이 흘렀다. 제안자는 전태일이다. 그의 노트에 담긴 인사말이다.

“안녕하십니까? 직접 찾아뵙지 못하고 지면을 빌리어 인사 올리게 됨을 넓으신 아량으로 이해하십시오. 본사는 금번 평화시장 피복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 태일피복입니다. 타사와 달리 철저한 품질 관리와 생산 원가를 고객 여러분에게 솔직하게 알려 드리고 생산과정을 소개하여 드립니다. 가격은 고객 여러분께서 생산 원가를 뺀 얼마간의 이익을 불러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본사의 이윤은 기업주와 종업원이 공평하게 분배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분들인 종업원을 건강 보호부터 교육에까지 철저하게 관리합니다. 본사의 모토는 정직입니다. 종업원을 기업주와 하등의 차이도 없이 대우하고 사업을 해나갈 수 있다는 기본을 보이기 위한 기업체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양심적이며 실용적인 상품은 논할 것도 없으며 모든 기업체의 모범이 될 것을 약속합니다. 끝으로 본사를 좀 더 이해 많으시기를 바라고 많은 충고와 사랑이 있으시기를 기다립니다. 감사합니다.”(1969년 11월1일)

근로기준법을 지켜 달라는 그의 외침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을 혼불처럼 지키고 있지만, 그가 만들고 싶었던 생산공동체에 대한 꿈은 상대적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노동운동 영역 바깥의 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조화로운 공동체를 만들려 했던 영국의 로버트 오언을 공상가로 치부했던 것만큼이나, 태일피복의 꿈은 자본주의를 학습을 통해 체계적으로 인식하기는 어려웠던 젊은 청년의 이상 영역으로만 남겨져 있었다.

그런데 기술발달로 생산과 소비 전 영역의 데이터를 축적·활용할 수 있고, 심지어 인간 심리의 심연까지 속속들이 밝혀내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왜 유토피아는 실현 가능한 사회로 기획되지 못하고 여전히 유토피아로 남아 있어야 할까. 그 기획은 영원히 노동운동의 영역이 될 수 없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 노동운동이 애초의 꿈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새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꿈. 그래서 오로지 쟁취의 대상만 있을 뿐,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기획자·창조자로서의 역할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화려한 동대문 패션시장의 배후에는 창신동·신당동 골목 안에서 장시간 저임노동으로 새벽부터 밤까지 바쁜 손을 놀려야 하는 봉제노동자들이 있다. 30년 이상 숙련된 손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노동생활은 30년 전이나 변함이 없다. AI도 아니고 로봇도 아닌 이 봉제인들의 신기에 가까운 손기술 덕분에 동대문시장의 패스트 패션(fast fashion)이 가능하다. 거창한 기계가 없어도 하루에 네다섯 가지 패턴의 옷을 번갈아 동시에 만들어 낼 수 있는 이 능력으로 패션시장은 매주 새로운 색을 칠할 수 있다.

하지만 끝없는 단가인하 압력, 그리고 일감을 얻기 위한 서로의 눈치와 경쟁으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노동은 가장 험한 노동이 됐다. 이제 봉제인들은 점점 나이가 들고 이 훌륭한 기술은 전수받을 이 없이 서서히 사라지게 될 운명이다. 젊은이들은 누구도 이 힘든 일에 뛰어들지 않기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자를 쓰면 되지 않겠냐고 할 수 있지만, 오랜 경험을 통해 익힌 손기술은 그리 쉽게 전수되지 못한다.

봉제산업은 서울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심제조업이다. 정확한 조사가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10만명 정도 종사한다는 추산이 있다. 그래서인지 정부와 서울시에서도 선언적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주로 유통시장을 중심으로 한 계획이다. 하지만 패션산업의 성장은 훌륭한 디자이너와 함께 지역적으로 밀집한 제조업이 균형을 이뤄야 가능하다. 패션의류산업의 가치사슬에서 봉제산업은 가장 기초를 이룬다. 이 기초를 튼튼하게 하지 못하면 어떠한 아름다운 선언적 계획도 모래 위의 누각이다.

흔히 SPA(제조·유통 일괄)라고 부르는 ZARA·H&M·유니클로 같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패스트 패션 기업들은 저개발국가의 젊고 어린 여성노동자들의 값싼 노동력에 기반을 두고 빠른 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가치사슬 변화를 통해 성장해 왔다. 그러나 패스트 패션은 노동력 착취 산업이라는 비판과 함께 지구의 환경에도 엄청난 재앙을 안기고 있다. 대안을 만들 전략이 필요하다. 노동력 사용에 대한 공정한 보상과 깨끗한 지구환경 보존이 가능하면서도 소비자들의 기호와 가치에 함께 조응할 수 있는 패션기업이 필요하다. 정보통신기술(ICT)의 발달로 소비자들의 창의가 곧바로 생산에 연결될 수 있고, 제품의 이력을 투명하게 추적할 수 있다. 그러한 가치를 인정하는 소비자들도 많다.

태일피복에 담긴 이상은 현실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는 패션산업을 한류 수준으로까지 도약시킬 수 있는 제조 기반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설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화섬식품노조 서울봉제인지회와 봉제인공제회가 있다. 50년 세월을 묵은 전태일의 꿈이 빛을 볼 때다.



노회찬재단 사무총장 (htkim82@gmail.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