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지윤 다른세상을향한연대 실행위원

코로나19 팬데믹 시대의 올해 메이데이는 낯설었다. 전 세계적 격리와 봉쇄가 우리가 거리로 나서고 광장에 모이는 것을 막았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우리가 어깨를 겯고 함께 행진하는 것을 힘들게 했다. 너도나도 쓰고 있는 마스크가 우리가 서로 이야기와 용기를 주고받는 것을 어렵게 했다.

한국에서는 메이데이 바로 전날에 이천 물류창고 화재 사건으로 수십 명의 가장 밑바닥 이웃들이 사망했지만,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을 부비며 슬픔을 나눌 권리마저 맘껏 누리지 못하게 됐다.

이것은 코로나19 팬데믹이 세상의 지배자들에게 가져다준 역설적 기회들을 보여준다. 저들은 대량실업과 해고의 쓰나미 속에서 불안감에 떠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중국인·신천지·성소수자 등 계속 새로운 희생양을 찾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우리는 되돌아봐야 한다. 메이데이에 우리는 기꺼이 모이고 다 함께 싸워 왔는가? 우리는 왜 모였고 무엇을 위해 싸웠고 어떤 요구를 해 왔는가? 메이데이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는가? 지금이 바로 이런 물음들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생각을 굴려 볼 좋은 기회일지 모른다.

피터 라인보우의 <메이데이 : 노동해방과 공유지 회복을 위한 진실하고 진정하며 경이로운 미완의 역사>(사진·도서출판 갈무리·1만8천원)는 이것을 위한 딱 좋은 마중물이다. 여기에 실린 11편의 글은 반복해서 그런 내용과 고민을 우리에게 던져 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메이데이 역사의 두 가지 측면을 모두 다루고 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우리가 많이 놓쳐 온 측면, 그리고 역사적으로 더 앞선 측면은 바로 ‘녹색’이다. 라인보우는 유럽 중세 역사의 삼림세에서 ‘메이데이의 기원’을 찾는다. 그때 사람들은 “숲속으로 들어가 나무를 심고 5월의 기둥을 세우고 춤을 추며 술을 마시고 사랑을 싹틔웠다”는 것이다.

당연히 부와 권력을 가진 지배자들은 이날을 싫어했다. “따라서 권위자들은 메이데이를 공격했다. 여성을 화형에 처하면서 억압이 시작되고 16세기 미국이 ‘발견’되고 노예무역이 시작되며 민족국가와 자본주의가 형성되면서 이러한 억압은 계속되었다.”

이어서 현대 메이데이 역사의 붉은색 측면을 봐야 한다. 그것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이 1886년 시카고 헤이마켓에서 시작됐다. 앨버트 파슨스와 오거스트 스파이스의 피가 여기에 뿌려졌다. 물론 메이데이의 붉은색 측면 또한 권력자들은 싫어했고 없애려고 했다. 특히 반세기에 가까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시대에 그런 시도는 절정에 달했다.

그리고 이러한 반세기는 이제 기후위기와 경제위기와 코로나19 팬데믹이 상승작용하는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다층적이고 복합적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라인보우는“여섯번째 종말이 우리 앞에 도래한다”고 경고한다.

하지만 오거스트 스파이스가 말했듯이 언젠가는 “오늘 당신들이 조르고 있는 목의 목소리보다 우리의 침묵이 더 강력한 힘을 가지는 날이 올 것이다”. “함께 서는 가운데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녹색의 축전”과 “붉은색의 시위”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더 큰 물줄기로서 거대한 바다를 이루는 날이 올 것이다. “깨어나라! 각성하라! 일어나라! 메이데이를 위해 점거하라!”

물론 메이데이 역사는 라인보우가 우리에게 알려 준 것보다 훨씬 더 많고 다양할 것이다. 녹색과 붉은색을 넘어서 다채로운 무지개의 역사일 것이다. 노동과 돌봄과 사랑과 연대는 공장과 거리와 광장만이 아니라 정신병동에서, 콜센터에서, 게이클럽에서, ‘찜방’에서도 특수하면서도 보편적인 이야기로 계속됐을 것이다. 곳곳에서 구조신호(메이데이! 메이데이!)를 울려 왔을 노동자들, 소수자들, 조선족들, 이주민들, 정신질환자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찾아서 듣고 더 채워 넣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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