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겨우 넘겼다. 몇 차례 독촉을 받고서도 도무지 써지지 않았다. 지난해 말, 선고된 대법원 판결에 관한 평석 원고였다. 민변 노동위원회 간사의 독촉 전화를 받을 때면 쓸 다짐을 했지만, 내 다짐은 마감일만 뒤로 미루는 것으로 끝나버리기 일쑤였다. ‘최후’ 통첩을 받고서 일요일에 사무실에 나가 원고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과반수노조의 동의로 취업규칙을 변경했어도 노동자 동의 없이 근로계약 기준을 삭감할 수 없다.’ 대법원 판결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랬다. 사용자가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기 위해서 근로기준법 94조에서 규정한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요건인 과반수노조 동의를 받아 회사규정을 개정했음에도 한 노동자가 그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 노동자가 기존 근로계약상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사용자가 임금피크제를 적용해 삭감한 것은 위법·부당하다고 삭감당한 임금을 청구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 원고는 한 지방공기업의 1급 직원인 노동자였다. 그와 상담하고서 소송대리인이 된 이후 1심부터 대법원까지 사건을 수행하면서 줄곧 취업규칙에 관해 나는 질문을 던지고자 했다. 사용자가 작성 및 변경의 권한을 가지는 취업규칙은 과반수노조를 포함한 근로자측 집단적 동의를 받아 변경한 경우라도 노동자가 체결한 근로계약 기준을 삭감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자 했다. 취업규칙과 노동자의 자유에 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법원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

2. 그런데 거창하게 노동자의 자유를 말하면서 기껏해야 취업규칙이냐고 당신은 내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노동자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사용자 자본이고, 그러니 문제는 계급이라며 내가 사소한 것에 시비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세월은 흐르고 혁명의 세상은 흘렀어도 여전히 계급이 세상을 가른다. 노동자와 노동운동도 계급의 눈으로, 당파성으로 사사건건 세상에 시비하지 않는 오늘이지만, 그래도 이 자본의 세상에서 계급을 떠나서는 노동자로 존재할 수 없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어도 계급이 문제인 것은 분명하다. 그 계급의 존재 이유가 무엇일까. 소유라고 우리는 학습했다. 농장·공장·사업장 같은 생산수단 소유가 세상의 지배와 피지배를 낳은 것이니, 계급의 존재 이유라고 배웠다. 즉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계급사회의 시작이고 끝이라고 봤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와 형상을 보고 원인과 내용을 들여다보지 않은 논리였다. 땅·물건은 지배를 모른다. 사물은 계급을 만들 줄 모른다. 아무리 그걸 품고 있어도 인간의 노동이 없으면 아무것도 낳지 못하는 것이니 계급도 존재할 수 없다. 노예가 있어야 했다. 인간의 노동이 있어야 했다. 비로소 세상의 생산은 존재할 수 있었다. 인간의 노동으로 생산이 가능했고, 확대 재생산이 가능한 인간의 사회는, 세상은 태어날 수 있었다. 땅을 가지지 못해서 로마의 노예가 된 것이 아니었다. 자유인이 주인으로 타인의 노동을 이용하기 위해 노예의 세상이 존재했던 것이다. 농장을 소유하고 소유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노동을 소유하고 소유하지 못해서 주인과 노예로 존재했다. 전쟁을 통해서든 채무를 통해서든 타인의 노동을 획득해서 이용할 수 있을 때에 자연의 대지, 땅은 비로소 생산수단인 농장이 될 수 있었다. 타인의 노동을 이용하기 위해서 세상의 주인은 노예·농노·노동자라는 타인이 필요했다. 계급은 생산수단이 아니라 타인의 노동을 이용하려는 지배의 산물인 것이다.

그동안 사물만 바라보며 통곡해 왔다. 공장을 빼앗아야 노동해방 세상을 쟁취한다고 외쳐 왔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공적 소유로 바꿔 내면 계급은 소멸하는 데로 나아간다며 투쟁했다. 인간의 노동을 이용하기 위한 지배와 계급의 본질을 들여다보지 않고 형상만 봤다. 타인의 노동을 이용하기 위한 채권관계가 본질이지, 인간의 노동을 배제한 사물에 대한 물권관계는 본질이 아니다. 인간은 근로계약이라는 채권관계로 노동자가 된다. 인간의 노동을 이용하기 위한 계약을 들여다보지 않고 생산수단만 들여다보면서 공적소유 전환 운운해 봐야 거기서 공적소유를 관리하는 자가 채권관계를 통해 그 세상을 확대 재생산해 나간다면 노동자에겐 지배·계급의 소멸이 아니라 그것이 유지된 채 노동해야 한다. 거기서 공적소유를 내세운 주인의식의 이데올로기로 노동이 강요될 것이다. 주인 이데올로기와 지배의 채권관계가 불일치하면서 그 지점의 해소를 위해 권력은 행사될 것이지만 공적소유의 관리자로서 권력에 의한 해결을 기대하기 어렵다. 결국 문제는 채권관계인 것이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서 노동자를 둘러싼 채권관계에 관심을 두고 시시비비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 이 나라에서 채권관계인 근로계약관계는 노동자의 자유를 빼앗는 사용자의 ‘법’ 취업규칙에 의해서 강제되고 있는 것이니, 이 나라 사업장에서 노동자의 자유는 취업규칙부터 살펴야 한다.

3. 취업규칙. 사업장에서 노동자의 근로조건과 복무규율 기준에 관한 준칙을 말한다. 이렇게 근로기준법의 취업규칙을 파악해서 노동법학자는 해설하고 법원은 판결해 왔다. 이 세상에서 노동자는 근로계약을 체결해 ‘근로자’로 되면 사용자에 근로 제공을 해야 한다. 이는 자유 노동이 아니라 사용자에 복종해서 노동하는 것을 말하고, 노예 노동의 근대적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용자와 근로계약을 체결하고 나서야 ‘근로자’로 돼 근로제공을 하는 것이니 근로계약 내용인 임금 등 근로조건에 관해서는 노동자가 사용자와의 합의로 정해야 할 일이다. 그러니 “근로조건은 근로자와 사용자가 동등한 지위에서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하여야 한다”는 근로기준법 4조는 국가 대한민국이 노동자에게 대단한 권리 내지 권한을 부여해 준 것이 아니라 그저 당연한 것을 규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무시됐다. 임금을 포함한 근로조건은 노동자가 자유의사에 따라 사용자와 합의해서 결정하지 않고, 사용자가 작성·변경 권한을 갖는 취업규칙에 의하는 것으로 취급됐다. 근로기준법에 사용자로 하여금 작성해 신고토록 하고서 사업장의 법으로 취급해 노동자에게 적용했다. 과반수노조의 동의나, 과반수노조가 없는 경우에는 집단적 회의 절차를 통한 근로자 과반수 동의라는 근로기준법상 절차를 거쳐 불이익변경된 취업규칙이 해당 사업장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기준으로서 법적 정당성을 취득한 것으로 보고 그 효력이 인정됐다. 이에 따라 임금 등 근로조건조차 사용자가 결정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오늘 이 나라에서 근로자는 자신의 근로조건을 사용자와 합의해 정하지 않고 사용자가 작성해 놓은 취업규칙, 즉 회사 제규정에 의해 정해진다. 노동자와 사용자 간 합의는 없다. 사용자가 작성해 놓은 기준을 적용받을 뿐이다. 한 마디로 이 나라에선 ‘근로자’가 자신의 근로조건에 관해서 사용자와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한다는 걸 찾아보기 어렵다. 이처럼 이 나라에서 노동자는 취업규칙에 의해 근로조건을 사용자와의 합의로 결정할 자유도 빼앗겨 왔던 것이기에, 당연히 취업규칙에 관심을 두고서 노동자의 자유를 말해야 하는 것이다.

4. 지난 11일, 원고는 재판에 참석했다. 대법원이 임금피크제 도입에 과반수노조가 동의했다고 해도 당사자인 근로자가 임금피크제 적용에 동의하지 않았으니 사용자가 임금피크제를 적용해서 임금을 삭감한 것은 위법·부당하다며 2심 판결을 파기해서 환송했던 터라, 그에 따라 광교신도시에 새로이 단장한 수원지법에서 열린 2심 재판에 참석했던 것이다. 피고 회사에서는 이미 퇴직하고서 용인의 한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코로나19로 일이 많지 않다고 말하고는, 대법원 판결이 선고된 직후 언론에 자신의 사건이 보도된 것을 읽었으며 경제신문 등에서는 사측 편에서 자신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기업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내용을 읽었다고 씁쓸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나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판결이라고 그에게 말해 줬다. 비록 원고 1명인 사건이지만, 그 사건의 무게는 수만명이 원고로 참여한 사건보다 결코 가볍지 않은 사건이었다. 그가 사무실에 찾아와 상담하던 당시를 떠올려 말했을 때 나는 수년간 진행해 온 재판을 돌아봤다. 사건을 수임할 당시에는 대법원까지 상고해서 파기환송 판결을 받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노동자의 자유를 내세운 주장을 하급심의 판사들이 받아 줬다면, 아마도 대법원 판결은 없었을 것이다. 오늘 이렇게 칼럼에 노동의 자유와 소유, 그리고 취업규칙에 관해서 끄적거리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이 세상에 끊임 없이 던져야 할 질문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대답 없는 세상에서 분명히 나는 언젠가 같은 말을 끄적거리고 있을 것이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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